《인류력사에는 우리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마촌작전)가 그런 이야기들중의 하나이다.
1934년에 접어들면서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는 더욱 격렬해졌다.
적들은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는 소왕청유격구에 공격의 예봉을 돌리고 이 일대에 관동군, 위만군, 경찰, 자위단으로 구성된 5 000여명의 무력을 들이밀었다.
그때 소왕청에는 2개 중대의 유격대력량밖에 없었다. 게다가 유격구에는 식량예비가 얼마 없었다. 유격전술상의 원칙을 놓고보면 이런 대결전은 사실 하지 않는것이 상책이였다. 그런데 대결전을 하지 않으면 적들이 두만강연안의 모든 유격구들을 삼켜버리고 인민혁명정부의 혜택속에서 참다운 평등과 자유를 누리던 혁명군중이 엄동설한에 굶어죽고 총에 맞아죽을수 있었다.
평범한 인민들과 유격구의 생사를 두고 의논하시던
그러시고는 적의 력량이 분산되여있을 때에는 힘을 합쳐 습격소멸하고 적이 력량을 집결하여 쳐들어올 때에는 분산하여 도처에서 적의 후방을 교란한다는 전술적원칙을 다시금 확정하시고 소왕청관내 전체 주민들에게 전민항전을 호소하시였다.
왕청에 오신 초기부터 유격구사수에만 매달리는 방어일변도의 경향을 반대하신
그러나 동만당과 현당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간부들은 적들이 집결해서 쳐들어올 때에는 무턱대고 우리가 집결해서 적을 방어해야 유격구도 지켜내고 인민들도 보호할수 있다고 하면서 지어 적후교란전에 대하여 인민들이야 어떻게 되든 군대만 살고보자는 사상이라고 까박을 붙이였다.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시여 적후교란전을 벌릴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신
맨처음으로 친것이 량수천자의 적이였다. 유격대의 벼락같은 기습에 위만군과 자위단이 녹아나고 일본령사관 경찰병영이 완전히 점령되였다. 량수천자에서 적후교란전의 첫 총성을 울린 유격대는 멀리로 사라지는척 하다가 제자리에 돌아앉아 신남구라는 곳에서 이동하는 적자동차수송대를 습격소탕하고 많은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유격대는 신남구에서 멀리 떨어진 북봉오동의 산악지대로 쥐도새도 모르게 쭉 빠져나가 그곳의 위만군과 경찰, 자위단원들을 모두 살상포로하였다.
북봉오동에서 승리의 개가를 올리고 북고려령을 넘어 사동방향에 진출한 유격대는 동골에 있는 산림경찰대를 공격하여 병영의 적들을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적의 동기 《토벌》을 분쇄하는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최후의 싸움은 도문-목단강사이의 철길을 끼고있는 주요군사요충지 대두천에서 벌어졌다. 적 《토벌》대로 변장한 유격대원들은 100여리의 험산준령을 강행군으로 단숨에 돌파한 다음 3개의 조로 나누어 대두천의 경찰서와 자위단실을 습격하고 군수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전투가 있은 다음부터 적들은 유격구를 조이고있던 포위망을 해제하고 90일전의 출발지점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연 석달동안 유격구의 존립을 위협하던 동기 《토벌》의 운명은 서산락일로 끝나고말았다.
당시 이 《토벌》에 참가하였던 나까가와 도모죠(전 일본관동군 제10사단 제10련대 제2대대 제7중대 소대장)는 자기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그리하여 소왕청, 대왕청지역의 유격근거지들을 〈소멸〉할 목적으로 1934년 1월 나까무라려단장의 지휘하에 다시 대〈토벌전〉을 벌리게 되였다. 일본군대는 이 작전때 포까지 동원하였다. … 그런데 이 동기작전도 추기작전때와 마찬가지로 완강한 반격을 받았으며 일본군대는 많은 희생자들을 내였다.》
정녕 소왕청유격구방위전투에서의 승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