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리영희
2022.3.22.
인간에게 있어서 집은 곧 보금자리이며 생활 그 자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되고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주택을 소유할 권리를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권리의 하나로 규정한 국제인권조약도, 인간의 본성적요구에 부합되는 생활을 담보하는 주택으로서의 징표를 제정한 국제인권기구의 결의도 존재하고있는것이다.
이 글은 가장 고결하고 한없이 겸허하며 소박한 인민적풍모를 천품으로 지니신 위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은 우리 인민과 세계 진보적인민들의 다함없는 존경과 흠모를 받으시였지만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특혜와 특전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우리 인민과 세계 진보적인민들의 다함없는 존경과 흠모를 받으시였지만 한생토록 자그마한 특전이나 특권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신 인민의 어버이이시였다.
주체110(2021)년 3월 26일 위대한 수령님의 저택이 자리잡고있던 보통문주변 강안지구에 현대적인 다락식주택구를 새로 건설하도록 하여주신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현지지도에 관한 소식을 통하여 세상사람들은 그곳에 위치한 우리 수령님의 저택이 한 나라 주석의 저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작고 수수한것이였음을 알게 되였다.
그러나 그처럼 작고 수수한 어버이수령님의 저택이 그이의 절대적인 요구에 따라 세차례나 설계가 부결된 끝에 완공되였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
한없이 겸허하고 소박한 인민적풍모를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에는 해방산기슭의 자그마한 저택에서 생활하시였으며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따로 정해놓은 저택이 없이 산골의 수수한 농가와 동기와집들에 자리잡았던 최고사령부지휘소 집무실을 그대로 숙소로 리용하시였다. 그리고 정전직후에는 인민들의 살림집부터 생각하시면서 저택건설을 만류하시였다.
그래서 일군들은 건물이 낡고 많이 파괴된 저택에서 생활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신상이 걱정되여 그이께 새 저택을 건설하는것이 좋겠다고 여러차례나 의견을 올리였었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집이 좀 낡았어도 일없다고, 자신의 집을 새로 짓는 문제는 평양시 다층살림집들이 다 일떠선 다음에 보자고 매번 거절하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 새 저택을 지어드리는 문제는 평양시에 륜환선거리가 완공되고 살림집들이 대대적으로 건설되여 인민들의 새집들이가 한창이던 주체44(1955)년말에 가서야 비로소 승인되게 되였다.
그해의 11월 어느날 평양시내를 돌아보며 해빛밝은 새 집들에서 인민들의 행복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것을 목격하고 돌아오신 위대한 수령님께 일군들은 이제는 우리 인민들의 살림집문제가 적지 않게 해결되였는데 새로 지을 저택설계도면을 보아주셨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씀드리였다.
또 거절하시지나 않을가 하는 은근한 걱정을 앞세우고있는 일군들을 둘러보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설계가 다되였으면 보아주겠다고 스스럼없이 응낙하시였다.
그런데 설계가들이 가지고온 저택설계도면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따져보시던 위대한 수령님의 안색은 점점 흐려지시였다. 잠시후 설계도면을 다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설계가들을 바라보시며 동무들이 잘못 생각하고 설계를 하였다고, 동무들이 잘못 생각한것은 자신과 인민을 분리하여본것이라고 조용히 나무람하시였다.
자리에서 일어서시여 잠시 방안을 거니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은 항일무장투쟁시기부터 언제나 대원들과 한가마밥을 먹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다고, 해방후에도 전쟁시기에도 인민들이 조밥을 먹을 때 우리도 조밥을 먹었고 인민들이 토굴집에서 살면 우리도 토굴집에서 살며 일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것은 자신의 생활준칙이라고, 동무들이 이것을 잘 모르고 우리 집설계를 한것 같다고 절절한 어조로 타이르시였다.
설계가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무엇을 몰랐는가를 깊이 깨달으며 감동에 젖은 눈길을 아래로 떨구었다.
이런 일군들의 마음을 헤아려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신채 설계의 부족점과 수정방향에 대하여 명백히 지적해주시였다.
우선 집을 크게 설계한것이 결함이다. 집은 작아도 아담하고 쓸모있게 짓는것이 좋다. 다음으로 집을 화려하게 꾸리려고 한것이 잘못이다. 대리석을 쓰고 수입자재를 쓰며 장식을 하는것도 그만두는것이 좋겠다. 집은 작게 지으면서 조선식으로 소박하게 꾸리도록 하여야 한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점들을 참고하여 집을 대폭 축소하는 방향에서 다시 설계하라고 따뜻이 이르시였다.
이렇게 되여 일군들과 설계가들이 그처럼 고대하며 벼르고별러오던 수령님의 저택설계안은 부결되였고 수령님께서 지적하여주신 방향대로 설계를 다시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하지만 두번째 설계안도 부결되였다.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이 가져온 두번째 저택설계도를 보아주시고 동무들이 아직도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것 같다고, 아직 집을 크게 설계하였으니 더 축소하여 설계하라고 이르시였다.
일군들을 통해 두번째 설계도가 부결당한 소식을 전해들은 설계가들은 세계의 그 어느 나라에나 왕궁이 아니면 국가수반들의 관저가 있는 법인데 이렇게 작은 집은 보지 못했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손으로는 더이상 작게 설계할수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였다.
하지만 인민들과 한치의 간격도 허용하지 않으시며 언제나 인민들과 꼭같이 소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설계가들은 또다시 그이께서 지적해주신 방향대로 저택의 많은 요소와 방들을 소박하게 고쳐 설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일군들과 설계가들은 이번에는 통과될것이라고 생각하며 대폭 축소하여 수정한 세번째 저택설계도를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세번째 저택설계도를 보시고 아직도 일부 요소들이 지내 큰감이 있다고 하시면서 또다시 부결하시였다.
사실 그 설계를 보면 당시 간부들의 집과 별반 차이가 없는 소박한 설계였다. 이것을 잘 알고있었던 일군들과 설계가들은 수령님께 세계1등급의 궁전을 지어드린대도 만족할수 없는 자신들의 심정과 함께 이제는 더이상 축소할수 없다는것을 절절히 말씀드리였다.
그러는 그들에게 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의 심정은 자신께서도 안다고, 하지만 인민들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자신에게는 크고 화려한 집보다 소박하고 아담한 집이 더 좋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안타까움에 젖어있는 일군들과 설계가들의 마음을 풀어주시려는듯 화제를 돌리시여 이제 평양의 장대재언덕에 소년궁전을 크게 짓자고 하는데 동무들이 그것을 설계할 때에는 하고싶은대로 마음껏 크고 화려하게 설계하라고 하시며 호방하게 웃으시였다.
결국 저택설계는 세번째에도 부결되여 또다시 수정되였다.
이렇게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네번째 저택설계도에 따라 위대한 수령님의 저택은 작고도 소박하게 보통강기슭에 건설되였다.
그대신 장대재우에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따라 설계가들이 한껏 마음먹고 설계한 학생소년궁전이 전쟁전에 건설을 시작했던 아동궁전의 근 15배나 되는 5만m2의 연건축면적을 가진 기념비적건축물로 웅장화려하게 솟아올랐다.
정녕 보통강기슭에 자리잡은 위대한 수령님의 작고도 소박한 저택은 우리 아이들과 인민을 위해서는 세상에 없는 특전과 특혜를 베풀어주시면서도 자신을 위한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불허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인민적풍모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또 하나의 혁명사적물이였다.
하지만 오늘 위대한 수령님의 그 저택이 자리잡고있던 보통강기슭에 우리 인민들이 쓰고 살 현대적인 다락식주택들이 건설되고있다.
백성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왕궁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어느 력사에나 있었다. 그러나 수령이 리용하던 저택을 허물고 그 자리에 백성들의 호화주택을 일떠세웠다는 이야기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이것은 오직 어버이수령님께서 그러하시였던것처럼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치시는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숭고한 위민헌신의 세계가 안아온 또 하나의 사랑의 전설이다.
하기에 우리 인민은 인민을 하늘처럼 떠받들며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시는 희세의 위인들을 대를 이어 어버이로 모시고 사는 긍지와 자랑을 안고 《세상에 부럼없어라》의 노래를 소리높이 부르고 또 부르고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