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민화〉의 본질은 조선사람들을 일본사람들과 꼭같은 〈1등국민〉으로 만들어서 흰쌀밥을 먹이려는것이 아니고 아침마다 〈궁성요배〉나 〈신사참배〉를 하며 〈황국신민서사〉를 외우는 일본국민의 종복으로 만들려는데 있었다.》 (
일제는 20세기 전반기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통치 40년간 우리 민족의 정신과 넋을 깡그리 말살하고 조선사람들을 저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하여 유미식민주의자들을 훨씬 릉가하는 가장 잔인하고 포악하고 야비한 《황민화》정책을 강요하였다.
일반적으로 지난날 식민주의자들의 첫째가는 특성이 야만성과 탐욕성, 철면피성에 있다는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국적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남의 나라를 강탈한자들은 모두가 포악하고 교활하고 후안무치한 자들이지만 일제야말로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빼앗고 다른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신사앞에 절을 하게 한 가장 야비하고 뻔뻔스러운 식민주의자들이였다.
일제는 1930년 9.18사변조작이후부터 우리 나라에 대한 식민지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고 조선의 인적 및 물적자원을 깡그리 동원하여 저들의 대륙침략야망을 원만히 실현할 목적으로 《황국신민화》의 미명하에 조선민족말살정책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었다.
무엇보다먼저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일본인화》하기 위하여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집요하게 강요하였다.
일제는 1936년에 《신사》제도를 일본의것과 똑같이 개편하고 조선사람들의 푼전을 략취하여 전국도처에 일본의 조상신이라는 《천조대신》(《아마데라스 오미까미》)과 력대 《천황》들의 사진이나 명찰을 걸어놓은 수백개의 《신사》를 설립한 후 조선사람들에게 그것을 참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일제는 1937년 10월 2일부터 《황국신민의 서사》《맹세문》이라는것을 조작해내여 그것을 모든 조선사람들이 일본말로 외우도록 하였으며 우리 인민에게 《궁성요배》와 《정오묵도》, 《멸사봉공결의》와 같은 놀음까지 강요하였다.
《조선총독》 미나미는 중일전쟁이 도발된 직후에 《황군》의 《무훈장구》를 빌겠다고 떠벌이면서 《조선신궁》에 달려가 《참배》를 하고는 즉시로 각도 지사들에게 관리와 민간인들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신사참배》를 하도록 할것을 명령하였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통하여 조선인민에게 《천조대신》이하 력대의 일본《천황》들을 숭배하도록 하며 그것으로써 《천황》정권은 《신성불가침》한것이라는 관념을 주입시키려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일제는 자국내에서 벌리는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일환으로써1938년 7월 7일에는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련맹》이라는것을 조작하고 그아래에 도, 부, 군, 면, 섬, 리, 부락과 기관, 기업소, 학교에 이르기까지 정연한 체계를 가진 산하련맹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이전《조선군》사령관이였던 기와시마를 이 《련맹》의 총재로 임명하고 군사적폭압의 방법으로 조선사람들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천황》에게 충성하게 하는 사상을 불어넣으려고 책동하였다. 이 《련맹》은 매달 초하루날을 이른바 《애국일》로 정하고 아래단체들로 하여금 이날에 《신사》앞에서 벌리는 여러가지 《국민의 례식》이라는데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참가시켰다. 일제는 1943년 2월부터 《가마다나》(일본의 개국신이라는 《천조대신》의 명찰을 넣은 일본식귀신상자)이라는것을 집집마다 나누어주어 《깨끗한 곳》에 매달아놓고 아침저녁으로 그앞에 절을 하도록 강요하였으며 《반상회》라는것을 조작하여 가미다나참배여하를 감독통제하였다.
다음으로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일본인화》하기 위하여 우리 인민들에게 파쑈적인 식민지노예교육을 악착하게 강요하였을뿐아니라 조선의 말까지도 없애버리기 위하여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조선에서 일제의 황민화교육은 중일전쟁도발후부터 더욱 강화되였다. 《황민화》교육정책은 조선의 청소년들의 배움의 길을 가로막고 그들에게《일본민족》, 《일본신민》이라는 사상관념을 주입함으로써 조선사람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노예, 《일본화》하려고 한 파쑈적동화교육정책이였다. 그것은 또한 조선의 인적 및 물적자원과 정신력을 모조리 략탈하고 동원하여 침략전쟁마당에 쓸어넣기 위한 이른바 《국가동원체계》, 《국민정신총동원체계》의 강요를 식민지노예교육을 통하여 보장하기 위한 정책이였다.
일제는 여러차례 교육령을 개악하면서 조선의 청소년들에게 일본의 정신과 문화, 도덕 등을 강제주입하였다. 특히 일제는 조선어교육을 완전히 말살하고 일본어교육을 강화하는데 피를 물고 달라붙었다. 일제는 1938년 4월 1일 새학년도시작과 함께 우리의 국어수업을 완전히 중지시키고 일본어시간수를 절대적으로 늘이였다. 당시 일본인교원들은 10살도 되나마나한 조선아이들이 학교에서 우리 말을 한다고 하여 목검으로 그들의 다리와 잔등을 굴뱀이 지게 두드려패고 머리에 물통을 뒤집어씌워 운동장에 장시간 끓어앉히는 벌을 가했을뿐아니라 아이들이 조선말한마디 하면 5전, 두번 하면 10전의 벌금을 받아냈으며 세번이상 하면 퇴학을 시키였다.
일제는 조선어말살책동도 식민지통치기구와 국가법령을 발동하여 강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어를 철저히 말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도청, 군청, 면사무소, 경찰서, 주재소, 파출소 등 행정, 경찰기관은 물론 헌병까지 총동원하였다. 일제는 1937년 3월에는 조선의 모든 관공청들에서 일체 공문서를 일본어로 작성하도록 도지사들에게 명령하였다. 또한 1938년부터 총독부결정으로 소학교와 간이학교를 중심으로 일본어강습소를 만들어놓고 주민들을 여기에 강제로 망라시켰다. 당시 일제가 만들어놓은 강습소는 무려 3 660여개나 달하였다. 1940년이후에는 일본어보급과 그 정상적인 사용을 《국민총력운동》으로 강행하게 하였다. 일제는 출판물, 방송, 연극, 영화, 음악, 어학부문은 물론 가정생활에서까지 민족어말살의 마수를 뻗치였다. 일제는 방송, 신문에 일본어를 보급하는 시간과 란을 설정하였으며 문학예술분야에서도 일본어보급과 그 정상적인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문학예술부문, 어학부문에 종사하는 조선사람들이 일본어로 창작하거나 연기하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게 만들었다. 일제는 관청에서 조선말을 쓰는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았고 지어 상점에서 상품을 살 때나 기차표를 살 때에도 무조건 일본말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민족어는 민족의 정신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므로 언어를 빼앗고 말살하는것은 민족의 전체 성원들에게서 혀를 잘라내고 존엄과 얼을 뽑아내는것과 같은 잔인무도한 행위로 된다. 언어를 빼앗는것은 몇몇 사람의 불행이나 희생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민족의 운명과 관련되는 문제로서 전체 조선인민을 한줄에 세워놓고 그들모두를 한칼로 쳐없애는것과 같은 대살륙이나 다름없었다.
다음으로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일본인화》하기 위하여 《창씨개명》을 강요하여 조선사람들이 성과 이름까지 빼앗기 위하여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사람의 성과 이름은 언어의 한 부분이며 사회력사적 및 민족적특성이 반영된 정신적유산이다.
일제는 1939년 11월에 조선사람의 고유한 성과 이름을 없애고 그것을 일본식으로 고칠데 대한 《제령》을 조작공포하고 총칼의 위협과 각종 악랄한 강도적인 방법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강제로 《창씨개명상담소》로 끌고가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칠것을 강박하였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의 자녀에 대하여서는 각급 학교의 입학과 진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제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국민》으로 지목하고 엄격히 감시탄압하였으며 《징용》과 《보국대》선발의 첫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물자《배급》대상에서 제외하였으며 지어 본인도 모르게 남의 성명을 제멋대로 갈아치우는 란폭한 행동도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조선사람의 이름을 쓴 꼬리표가 달린 화물은 철도에서 취급하지 못하도록하였다.
이처럼 일제는 조선인민을 저들의 영원한 식민지노예로 만들며 우리인민의 오랜 력사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말살하려 하였으며 심지어 우리의 말과 글을 빼앗고 《창시개명》까지 강요하는 한편 저들의 《신사》앞에서 절을 하게 하는 아직 인류력사에 찾아볼수 없는 야비하고 잔인무도한 죄악을 감행하였다.
일제가 조선인민에게 강요한 반인륜적죄악은 세기가 바뀌고 천만년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절대로 덮어버릴수 없다.
오늘도 일본군국주의자들은 지난날 우리 인민에게 끼친 죄악을 사죄할대신 이루지 못한 옛야망을 이루어보기 위해 피를 물고 칼을 벼리고있다.
조선인민은 일제가 식민지통치 40년간 감행한 천고만고의 죄악을 한시도 잊지 않고있으며 천백배의 값을 톡톡히 받아내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