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처럼 전쟁마당에 <위안부>까지 끌고다니며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사람들을 도살한 군대는 세계전쟁사에서 더는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
1930년대후반기 중국본토와 아시아나라들에 대한 침략전쟁기간에 일제는 수많은 조선녀성들을 일본군성노예로 끌어다가 귀축같은 성강탈행위를 감행하고 야수적으로 학살하였다.
그것은 침략전쟁의 장기성으로 하여 일본군부가 군《위안소》라는 《합법》적인 강간장소를 설치하여 병사들의 성욕을 만족시켜주는 방법으로 부대의 전투력과 치안을 유지해보려고 시도한것과 관련되였다.
일본군성노예범죄는 처음부터 일본정부의 승인밑에 일본군부가 직접 지시하고 감행한 조직적인 집단강간, 륜간행위였다.
1938년 4월 남경주재 일본총령사관에서는 일본륙군성 병참사령관, 총령사, 령사관 해군무관의 참석하에 륙군성, 외무성, 해군성 3성공동회의가 열렸는데 여기에서는 《위안소》의 설치 및 관리원칙과 성노예확보문제가 토의되였다.
또한 일본륙군성의 이마무라 히로시와 병무국장 우메즈 미쯔로가 공동으로 합의작성하고 1938년 3월 4일부로 하달한 《<군위안소>종업부(위안부)모집에 관한 건》에는 그 사업에서 지켜야 할 원칙들이 다음과 같이 규정되여있었다.
첫째, 《위안부》모집을 철저히 파견군의 통제하에 진행할것.
둘째, 민간인 전문매춘업자들을 모집하려는 경우 그들을 엄선할것.
셋째, 《위안부》모집시에는 현지 헌병대와 경찰들과 련계를 가지고 그들의 도움으로 진행할것.
이에 따라 1938년 북중국파견군 참모장 오까베는 북중국에 파견된 각 부대들에 《강간건과 성병방지》를 위해 가능한대로 신속히 《성적위안》설비를 갖추어놓음으로써 규률을 위반하는 군인들이 없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1940년 9월 일본륙군성은 《…특히 <성적위안>이 군인들의 <군기유지>, <범죄> 및 <성병방지> 등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다.》는 통보를 출정부대들에 하달하였다.
이러한 군부의 지시들에 따라 일본군성노예련행이 본격적으로 감행되였다.
일제는 《위안소》들에 종사할 성노예보장지를 조선으로 지목하고 수많은 순진한 조선녀성들을 닥치는대로 끌어갔다.
그것은 일제가 조선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강점하고 가장 포악한 파쑈통치체제를 수립해놓은 조건에서 관권과 군권을 발동한다면 조선녀성들을 닥치는대로 얼마든지 끌어갈수 있으며 그들을 조선국내가 아니라 멀리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나라들, 태평양의 섬들에 끌어다가 가혹한 성폭행을 들씌워도 본인의 항거외에는 주민들이나 부모들의 항거에는 부딪치지 않으리라고 타산하였기때문이였다.
일제는 조선의 방방곡곡에서 회유, 협박, 랍치 등의 강압적인 방법으로 젊은 녀성들을 끌어다가 일본군의 성노리개로 만들었다.
이미 조선에서 인적자원수탈을 위한 각종 악법들을 조작해놓은 일제는 조선총독부에 성노예들을 모집할것을 지시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각 도경찰부에, 각 도경찰부는 각 군에 지령하였으며 각 군은 각 면에 지령을 하달하고 경찰들과 면장, 촌장, 구장들을 발동하여 녀성들을 끌어갔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부터 일제는 성노예조달을 강제적 또는 랍치의 방법으로 무자비하게 벌리였다.
일제는 군대와 경찰, 헌병들을 총동원하여 낮과 밤이 따로없이 거리와 마을들을 샅샅이 뒤지였고 녀성이라면 그가 소녀이건 유부녀이건 관계없이 닥치는대로 붙잡아갔다. 그속에는 아닌 밤중에 마을에 달려든 놈들에게 잡혀간 처녀도 있었고 장을 보려 가던 아이가 있는 젊은 녀인들도 있었다.
생존한 성노예녀성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밥을 짓다가, 소여물을 끓이다가, 물을 긷다가, 밭에서 김을 매다가, 산나물을 캐다가, 길을 가다가, 빨래를 하다가 무작정 달려드는 일제군경놈들에게 붙잡혀 행처도 알릴사이없이 성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
일제는 지어 일선장병위문이라는 구실로 11살난 국민학교의 애어린 소녀들과 임신부들까지도 성노예로 강제로 끌어갔다.
일본군성노예 강제련행책임자의 한사람이였던 요시다 세이찌는 1992년 2월 《혹가이도신붕》기자와의 회견에서 《나는 조선인<위안부>를 강제련행했던 그야말로 노예사냥군이였다. 내가 직접 지휘하여 강제련행한 <위안부>만도 1 000명이 넘는다. 어떻게 련행했는가.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녀자들을 길가에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려눕혔다. 총쥔 순사의 감시속에서 울부짖는 녀자들을 때리고 젖먹이어린애는 떼여놓고 2~3살난 어린애가 울면서 따라오면 그를 들어 내동댕이치면서 강제로 차에 실었다. 애원하는 할머니는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마을은 온통 수라장이 되군하였다. 분명히 해둘것은 조선녀성들을 <위안부>로 모집한것이 아니라 강제로 체포해갔다는 점이다. …<위안부>로 강제련행한 곳은 조선뿐이였다.》고 실토하였다.
이렇게 강제랍치당한 조선녀성들은 일제침략군놈들의 호송밑에 기차나 함선, 군용차에 실려 조선국내와 중국, 몽골, 일본, 동남아시아, 싸할린, 꾸릴렬도, 인도네시아, 괌도 등 일본군이 전개된 모든 전선과 주둔지역들에 끌려갔다.
일제는 끌어간 조선녀성들을 개별적건물이나 천막, 군인숙박소같은데 분산배치하고 그곳을 《군위안소》, 《군인구락부》, 《군인오락소》 등으로 불렀다.
조선녀성들이 들어있는 《위안소》는 범죄자들을 가두어두는 감옥보다 경비와 감시가 더 살벌하였다.
《위안소》와 그 구획들에는 높은 담장이 둘러쳐있었고 그우에 가시철조망이나 여러겹의 전기철조망들이 늘여져있었으며 정문에는 항상 무장보초가 서있었고 완전무장한 헌병놈들이 군견까지 동원하여 상시적으로 순찰하면서 성노예로 끌어온 녀성들의 일체 외출을 엄금하였다.
일제침략군놈들은 성노예로 끌어온 조선녀성들을 이런 무시무시하고 숨막히는 악마의 소굴에 갇아놓고 인간이하의 천대와 멸시를 다해가며 순결한 그들의 정조를 강탈하였으며 지어 목숨까지도 무참히 빼앗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비참한 처지에서 성노예녀성들은 하루에 수십명씩의 일본군호색광들을 상대로 《성봉사》를 하여야만 하였다.
몸서리치는 그때의 광경에 대하여 한 피해자녀성은 이렇게 증언하였다.
《<위안소>에 도착하자 놈들은 우리에게 일본 기모노를 입히고 머리를 일본식으로 잘라버렸으며 나에게 <우따마루>라는 일본이름을 달아주었다. 그리고는 우리들을 따로따로 자그마한 방에 밀어넣었는데 얼마 지나서 일본군대가 들어오더니 미친듯이 달려드는것이였다. 내가 몸부림치며 반항하자 그놈은 짐승같은 소리를 지르며 마구 차고 때리다가 나중에는 군도를 목에 대고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였다. 그바람에 군도에 베여 목에서 선지피가 흘러 온몸을 적시였다. 우리는 이런 짐승같은 놈들을 하루에도 20~30명이나 치루어야 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공손하게 대하지 않으면 마구 폭행을 가하였으며 나중에는 머리끄뎅이를 잡고 질질 끌어다가 처벌방에 처넣군 하였다.》고 절규하였다.
일제침략군놈들이 조선녀성들에게 가한 성폭행은 그 야수성에 있어서 짐승도 낯을 붉힐 극도의 야만적이고 잔인한것이였다.
놈들은 크기가 2m2정도 되나마나한 작은 방에 조선녀성들을 한사람씩 가두어넣고 무제한한 《성봉사》를 강요하였다.
성노예녀성들은 낮에는 병사들을, 밤에는 장교들을 상대로 매일 수십명씩 《성봉사》를 하여야 하였고 어떤 날은 무리로 달려드는 놈들에 의해 새벽까지 눈한번 붙일새없이 고역을 치루어야 하였다.
일제야수들은 변태적인 성욕을 채우기 위해 생트집을 걸어 성노예를 쓰러뜨리고는 얼굴이며 코와 젖꼭지를 이발로 물어뜯어 피투성이로 만들었으며 총창으로 젖가슴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란도질하는 만행도 꺼리낌없이 감행하였다.
또한 성노예녀성들을 저들의 성욕을 채워주는 성노리개로 실컷 부려먹다가도 조금이라도 불응하거나 비위에 거슬리면 무턱대고 폭행을 가하여 때려죽이거나 밟아죽였으며 일본도로 찔러죽이고 총으로 쏘아죽였다.
일제가 성노예녀성들의 목숨을 파리목숨만큼도 여기지 않고 마구 살해한데 대하여 피해자들은 격분에 차 증언하였다.
《…내가 14살나던 해에 일본군병영에 끌려가니 나같은 처녀애들이 여러명 되였다. 우리는 이때부터 일본놈들의 성노예로 되였다. 놈들은 우리가 조금만 반항해도 가차없이 잔인하게 죽였다. 하루는 금산이라는 동무가 우리에게 무슨 죄가 있어 그런 일을 강요하는가고 항의하였다. 그러자 가네야마라는 놈은 <조선년 지독하다. 맛을 보여 줄테다.> 라고 하더니 졸병들에게 못이 삐죽삐죽 나오게 박은 판자를 가져오게 하였다. 여러놈이 달라붙어 금산이의 옷을 강제로 벗기더니 한놈은 머리채를, 다른 한놈 은 발목을 잡고 그를 판자우에 눕히고 좌우로 굴리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피가 나기 시작하더니 잠시후에는 못에 살점이 묻어났다. 그가 피가 질벅한 판자우에서 정신을 잃자 놈들은 우리들에게 <너희들도 말을 안들으면 이렇게 죽인다.> 라고 위협하며 일본도로 그의 목을 내리쳐 죽였다. 이날 놈들은 저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10여명의 처녀들을 이렇게 악독하게 죽였다.》
다른 한 피해자는 《…일본군 6사단의 <일본군위안부>로 옮겨갔을 때였다. 이 6사단은 <돌격대>로 자처하는 부대였는데 하나와 같이 포악무도하여 <위안소> 에 올 때에도 시퍼런 칼을 뽑아들고 오군하였다. 평양이 고향이라는 <하나꼬>라고 불리우던 녀자가 임신을 하게 되였는데 다나까라는자는 술을 잔뜩 마시고 들어와 그를 쓰러뜨리고 사정없이 배를 걷어찬 다음 칼로 그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 란탕쳤다. 그리고는 그의 밸을 칼끝으로 끄집어내여 <위안부>들의 목에 걸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방바닥의 피를 핥으라고 하였다. 이때 많은 녀자들이 기절하였고 심장이 파렬되여 죽은 녀자들도 있었다.
하루는 이 다나까라는자가 큰개 한마리를 끌고들어와 개에게 <나도 했으니 너도 하라.>고 부추겨대며 나를 물어뜯게 하였다.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지자 놈은 찬물을 끼얹고는 미친듯이 달려들어 수욕을 채웠다. 지어 놈들은 마취약을 먹인 다음 담배에 휘발유를 묻혀 입과 코, 자궁에 꽂아놓고 불을 달아놓아 화상까지 입게 하였다. 일본패망 20일을 앞두고 일본군은 약 150명의 <위안부>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차례로 목을 쳐 죽이였다.》고 규탄하였다.
또 다른 한 피해자는 《…나는 <위안부>로 있는 동안에 일본놈들의 손에 죽은 처녀들만도 4명이나 보았다. 경상도가 고향인 18살난 김기복이라는 처녀는 놈들이 시간에 관계없이 줄지어 달려들자 참지 못하고 놈들과 싸우게 되였다. 그러자 일본놈들은 그 처녀를 전주대에 매달아 밤을 새우게 하고 다음날에는 처녀들을 모두 전주대앞에 모이게 하였다. 그러고는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이년처럼 죽여버리겠다고 하면서 그 처녀의 다리를 자르고 팔을 잘라내고 머리를 동강내서는 부근에 있는 강에 던졌다. 나는 16살 되던 해에 임신하게 되였는데 놈들은 나의 배를 째여 태아를 꺼내 란탕쳐서 강물에 던졌으며 다시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다고 하면서 자궁을 들어내였다.》라고 폭로하였다.
일제침략군놈들의 조폭한 성강탈과 영양실조, 생활상고통으로 하여 수많은 성노예녀성들이 성병과 결핵, 황달 등 각종 질병에 걸려 속절없이 시들어갔다.
성노예녀성들은 병약한 몸으로 앓아누워서도 일제침략군놈들의 성강탈에 응해야만 하였고 성병에 걸리거나 임신을 하여도 귀신몰래 죽어야 하였다.
놈들은 성노예녀성들이 성병에 걸렸다는것을 알면 몰래 끌어다가 생매장하거나 각을 뜨고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죽였으며 임신을 한 경우에는 칼로 그의 배를 마구 갈라 태아를 란도질하여 죽여버렸다.
참기 어려운 모욕과 굴욕, 천대와 멸시, 육체적고통속에 몸부림치다가 도망을 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녀성들도 있었다.
일제는 성노예녀성들이 도망치면 기를 쓰고 쫓아가 붙잡아와서는 다른 녀성들이 보는 앞에서 짐승처럼 달려들어 륜간한 후 무자비한 폭행을 가했으며 전주대나 나무에 며칠씩 거꾸로 매달아놓고 물 한모금 먹이지 않으면서 말리워죽이였다.
일제살인마들은 지어 전투에서 패하여도 그 화풀이로 성노예녀성들을 짐승처럼 릉욕하고는 총칼로 쏘고 찔러죽였으며 퇴각할 때에는 거치장스럽다고 하면서 집중사격을 가하여 무리로 학살하였다.
성노예녀성들에 대한 야수적인 살륙만행은 일제의 패망이 박두하면서 더욱 악랄하게 감행되였다.
패망에 직면한 일제우두머리놈들은 저들의 성노예만행이 세상에 알려지는것이 두려워 각 부대들에 그들을 살해할데 대한 살인지령을 하달하였고 그 지시는 현지에서 잔인무도하게 집행되였다.
일제침략군놈들은 노예처럼 혹사시키고 부려먹던 성노예녀성들을 무작정 끌어내여 땅을 파게 하고는 그속에 밀어넣고 생매장하여 죽였으며 일정한 곳에 모이게 하고는 수류탄벼락을 들씌웠고 강제로 벼랑에서 떨구거나 큰돌을 매달아 바다나 강물에 처넣어 수장해버렸다.
또한 땅크나 군용차로 깔아죽이였고 건물에 가두어넣고 휘발유를 뿌린 다음 화염방사기를 쏘아 불태워죽였으며 일본도로 목을 치고 각을 떠서 죽였고 사지를 찢어 무참히 살해하였다.
일제침략군놈들의 이와 같은 귀축같은 만행으로 하여 너무도 아까운 꽃나이의 조선녀성들이 아름다운 청춘을 무참히 짓밟히우고 그리운 고향 멀리 이역의 하늘아래에서 생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일제침략군 40명당 1명의 비률로 성노예가 종사하였으며 20여만명의 순결한 조선녀성들이 일본군의 성노예로 끌리워갔다고 한다. 그들중 살아서 고향에 돌아온 녀성들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세계전쟁사의 그 어느 시기에도 있어보지 못한 군대를 대상으로 한 전문적인 《성봉사》, 성노예생활의 《합법화》와 강제적인 집행은 극도의 인간증오, 민족멸시가 골수에 꽉 들어찬 일본사무라이족속들만이 감행할수 있는 20세기의 반인륜적특대형범죄이다.
일본정부는 패망한지 70여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일본군성노예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사죄와 배상을 회피하고있다.
우리 인민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이 천인공노할 야수적만행을 잊지 않고있으며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여도 그 피값을 반드시 받아내고 천백배로 복수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