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일생에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

 2021.8.18.

《ㅌ.ㄷ》에서 닻을 올린 조선혁명은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의하여 《ㅌ.ㄷ》에서 개척된 주체의 혁명위업은 오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밑에 힘있게 전진하고있다.

20세기에 추켜든 혁명의 붉은기를 21세기에도 변함없이 높이 들고 나가는 우리 혁명의 자랑찬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95년전 화전에서 일생에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을 내리시여 조선혁명이 나아갈 가장 정확한 궤도를 마련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인상을 다시금 돌이켜보게 된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내가 화성의숙을 다니다가 반년만에 중퇴하고 길림으로 간것은 내 생애에서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이였다.》 (김일성전집》제95권 177페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15(1926)년 10월 참다운 공산주의적 혁명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시고 《ㅌ.ㄷ》의 리념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화성의숙을 중퇴하시는 대용단을 내리시였다.

화성의숙의 중퇴, 여기에는 위대한 혁명가,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수령님의 숭고한 정신세계가 그대로 함축되여있다.

그 대용단에는 우선 당시까지 우리 혁명을 포위하고있었던 민족주의울타리를 깨고 뛰쳐나올 위대한 수령님의 대담한 결심이 담겨져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화성의숙의 중퇴는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 학교로부터 다른 학교에로의 전학이 아니였다.

그것은 취약해질대로 취약해진 부르죠아민족주의에 대한 부정이시였고 조선혁명의 새로운 길에로의 지향이시였다.

원래 민족주의는 민족의 리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인 사상으로 민족해방투쟁무대에 맨 처음으로 등장한 하나의 애국사조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 근대혁명과 민족해방투쟁의 첫 시기에 일정한 역할을 놀았던 민족주의는 그후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부르죠아지가 반동적인 지배계급으로 되면서 자본가계급의 리익을 옹호하는 사상적도구로 전변되였다.

부르죠아지의 리익을 민족의 리익인것처럼 내세운 부르죠아민족주의의 제한성과 약점은 1919년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여지없이 드러났지만 1920년대중엽까지도 완고한 부르죠아민족주의는 민족해방투쟁의 지도적위치에서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았으며 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 거기에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있었고 후대교육에서도 사회주의사상보다 민족주의사상을 더 많이 배워주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인간적인 생활속에도 공산주의자들보다 민족주의자들이 더 많았다.

그들은 김형직선생님께서 일찌기 세상을 떠나신 다음에도 선생님과의 친분을 귀중히 여기면서 수령님의 가정을 찾을적마다 적게나마 생활에 필요되는것을 들고왔으며 남다른 품성을 지니신 위대한 수령님을 사랑해주고 장래문제도 토론해주면서 자기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민족주의운동의 선두에 나서주실것을 기대하고있었다.

이처럼 화성의숙을 중퇴하실 당시까지도 위대한 수령님을 둘러싼 환경과 조건은 그 영향력을 무시할수 없었던 반세기이상의 력사를 가진 민족주의의 포위속에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민족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의 방향전환에 들어선 조선혁명을 서서히 흐르는 력사의 흐름속에 내버려둘수 없으시였고 아버님친지분들이 인간적으로는 한없이 고맙고 존경이 갔지만 그런 동정과 체면때문에 자신께서 낡고 보수적이라고 규정한 사상과 외교하면서 적당히 지내는것은 오히려 자신을 자식처럼 대해주는 아버님의 친지분들을 속이는것으로 된다고 생각하시면서 화성의숙의 중퇴라는 대용단을 내리시였다.

그 대용단속에는 또한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조국과 인민, 시대와 혁명에 자신과 가정의 모든것을 다 바치실 위대한 수령님의 희생정신과 비장한 각오가 담겨져있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자기희생을 각오한 그런 결심을 누구나 다 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한몸을 불태워 진리를 밝히고 인민대중을 불러일으켜 불의의 세상을 뒤집어엎는 혁명가만이 할수 있다.

그러나 혁명가도 인간이며 그들에게도 가정이 있고 그 가정에 대한 의무감이 있다.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도 아버님없는 집안의 맏장손으로서 앓고계시는 어머님과 어린 두 동생을 돌봐야 할 의무가 있었다.

아버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 가정을 유지해나가는데서 나서는 여러가지 문제들은 자연히 수령님의 두 어깨우에 지워지게 되였다.

이제 민족주의자들이 추천하였고 그들이 경영하는 학교를 중퇴하고 기대와는 다르게 새로운 길을 선택한다는것은 아버님없이 힘들게 살아가는 어머님과 동생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을 멀리하는것으로써 남달리 효도가 깊으신 위대한 수령님께는 쉽지 않은 결심이였다. 더구나 무료로 배워주는 의숙을 중퇴하고 다른 학교에 가서 공부하겠다는것은 삯빨래, 삯바느질로 어렵게 생활을 유지해나가시는 어머님께 학비부담까지 시키는것으로써 생각이 깊어지시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길이 비록 자그마한 가정적테두리에서 효도를 다하지 못하는 길이며 비록 그 길이 가정에 타격으로 되는 길이라고 해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아버님의 유언을 지키기 위한 길이며 나라와 가정에 진짜 효자가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앞으로 헤쳐가셔야 할 길은 혁명의 초행길이였다.

당시까지 부르죠아민족주의가 공산주의에 의하여 교체되고있었지만 식민지나라들에서의 혁명방식에 대하여서는 그 누구도 제기하지 못하고있은것으로 하여 그길에는 이끌어줄 지도자도, 지켜줄 보호자도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길이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생소한 길이였지만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칠것을 각오하시고 화성의숙의 중퇴라는 대용단을 내리시였다.

그 대용단속에는 또한 혁명에 헌신하신 부모님들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존경심과 확고한 믿음이 깔려있었다.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생존시 위대한 수령님께 레닌에 대한 이야기, 사회주의쏘련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여주시였으며 민중이 잘사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시였다.

이러한 김형직선생님의 말씀과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사상은 위대한 수령님의 성장에 큰 자양분이 되였으며 중퇴결심도 바로 아버님에 대한 그런 믿음에 기초한것이였다.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는 생존시 사리사욕이 없이 혁명을 위해 자신의 한몸을 초불처럼 태우시며 살아가시였다.

가는곳마다 후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시였고 한푼두푼 모으신 돈으로 자제분들에게 사탕이랑 사주고 싶으셨으나 그것으로 풍금을 비롯한 교구비품을 마련하시였다. 만경대고향집에 있는 농쟁기나 가정도구들도 모두 할아버님이신 김보현선생님께서 남기신것이지 아버님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자식들에게 물려주신것이 아니였다.

인간으로서는 청렴하게 사시였고 혁명가로써는 결백하게 사시며 자신을 혁명에 고스란히 바치신 김형직선생님의 생애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공적인것을 위해 사적인것을 희생시키는 대용단을 내리게 하였다.

어머님이신 강반석녀사께서도 언제나 혁명가의 안해답게 자신의 모든것을 혁명하는 사람들의 뒤시중에 묵묵히 바치시였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김형직선생님께서 평양숭실중학교를 중퇴하시고 직업적인 혁명의 길에 나서시였을 때에도 리해하시였고 선생님을 따라 조선과 만주의 여러 지역을 다니시면서 혁명가의 안해답게, 동지답게 살아오시였다. 생활에서는 열두식구의 맏며느리로 어려운 살림살이를 도맡아하시면서도 남편이신 김형직선생님에게 생활적인 문제를 말씀올리거나 그것으로 선생님의 사업에 지장을 준 일이 단 한번도 없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한생을 살아오신 강반석어머님이신것으로 하여 혁명을 위한 자신의 중퇴결심을 리해하시고 오히려 지지해주시리라고굳게 믿으시였다.

참으로 당년 15살의 나이에 자신의 출세나 영달을 위한 대용단이 아니라 조국과 인민의 아들로서의 책임감으로부터 내리신 대용단, 이것은 그 나이의 청년들이 누구나 내릴수 있는 용단이 아니였다.

오직 애국, 애족, 애민을 가풍으로 삼고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이라면 언제나 용약 떨쳐일어나싸운 만경대의 가문에서 탄생하시여 성장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만이 내리실수 있는 대용단이였다.

일생에 처음으로 되는 대용단, 그것은 한평생 자신의 모든것을 조국과 혁명에 헌신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위인상의 축도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10대의 어리신 나이에 제때에 화성의숙에서 중퇴결심을 내리신것으로 하여 조선혁명은 자기 발전의 빠른 길을 택할수 있게 되였다.

조국과 인민을 위한 혁명의 길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불멸의 업적은 오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령도밑에 전진하는 조선혁명의 길에 더욱 찬연히 아로새겨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