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력사유적과 유물은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민족의 재보이며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발전된 문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수많은 성들을 쌓았다.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성곽자료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 리행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보충하여 엮은 지리책. 55권)과 《대동지지》(1864년에 지리, 지도학자인 김정호에 편찬된 우리 나라 지리책. 32권 15책임)들에도 반영되여있지만 그것들은 대체로 각 군, 현들을 단위로 하여 비교적 간결하게 수록하고있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1907년에 편찬된 민족고전으로서 우리 나라 고대, 중세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과학, 군사, 교육, 법률 등에 관한 자료들을 부문별로 구분하고 다시 그것을 항목별로, 년대순으로 분류정리한 책. 16개의 고에 250권 50책임)의 《여지고》(우리 나라의 자연, 정치, 도로, 군사, 력사, 문화 등을 각 도별로, 각 군, 현들을 단위로 하여 서술한 지리책임)에는 우리 나라에서 력대로 쌓아온 수많은 성곽자료가 《고도성》과 《성곽》이라는 항목아래 풍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반영되여있을뿐아니라 그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와 축성방법, 성을 중심으로 한 방위대책적의견들이 반영되여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서는 무엇보다먼저 《고도성》이라는 항목아래 마한, 고구려(B.C.277‐668년), 백제(B.C. 1세기말엽‐660년), 신라( 1세기초중엽‐935년), 고려(918‐1392년), 조선봉건왕조(1392‐1910) 등 이전 왕조들의 도성건축경위, 그 내용 등과 고구려의 부여장성, 신라 패강장성, 고려의 류소장성 등 옛날의 《정계장성》들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마한으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에 존재하였던 도성들의 지리적위치와 성곽들의 이름, 그 축성과 보수년대, 성의 규모와 크기, 재질 등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여있는데 이것은 우리 나라 도성들에 대한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로 된다. 이밖에도 여기에는 삼국시기부터 고려시기를 거쳐 조선봉건왕조전반기에 이르기까지의 변방에 성을 쌓은 자료들이 체계적으로 그리고 년대별로 자세하게 기록되여있어 이 부문에 대한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된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다음으로 삼국시기부터 고려, 조선봉건왕조후반기에 이르기까지 력대로 쌓아온 수많은 성들에 대한 자료들이 각 도, 군, 현들을 단위로 하여 서술되여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 올라있는 우리 나라 성곽들의 총개수에 대하여 도별로 나누어 도표화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도표에서 보다싶이 당시 리용할수 있었던 성은 456개이고 그 나머지는 지난 시기에는 성새로 되였으나 그 당시에는 옛터만 있거나 페허로 되여 쓸수 없는것들이였다.
이것을 보면 우리 나라 전반지역들에 분포된 성곽들의 총 개수를 기본적으로 파악할수 있다.
성곽은 일반적으로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군사시설물의 하나였던것만큼 놈들의 침입을 많이 받아온 변강지역들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다. 때문에 우리 나라의 성곽들은 북쪽으로는 평안도와 함경도지방들에, 남쪽으로는 경상도와 전라도지역들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여있는 반면에 그밖의 강원도와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의 지역들에는 많지 않다. 그러한 사실은 15세기 초중엽 4군6진의 설치와 16세기의 임진조국전쟁이 잘 말하여준다. 그러므로 당시에 리용할수 있던 성곽들은 북부국경지역을 접한 평안도와 함경도지역과 남쪽변방이였던 경상도, 전라도의 지역들에 많았을뿐아니라 이미 옛터만 있거나 페허로 되여버린 성곽들도 역시 이 지역들에 많이 배치되여있었던것이다. 이것은 력대로 우리 인민들의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이 주로 이 지역들에서 많이 진행되였다는것을 보여주는 생동한 자료라고 할수 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줄 목적밑에 편찬된 문헌인것만큼 여기에는 특히 우리 나라 성곽들이 구체적인 항목들로 비교적 자세히 서술되였다.
그 항목들을 보면 대체로 성곽의 축성경위, 수축경위, 동원인원수, 성과 관련된 전설들과 전쟁기사들, 성의 위치, 주위환경 및 지형조건, 산성, 읍성, 장성의 구별, 현행성인가 페성인가, 방수군의 유무, 성의 구조(토성, 석축, 벽돌성의 구별, 주위와 높이의 척수, 녀장, 성문과 암문, 옹성, 치성, 익성, 곡성, 문루, 포루, 해자, 수구문), 성의 보장능력, 부근의 다른 성들과의 전략전술상의 호상관계 등이였는데 그것은 해당 성곽의 내용과 그 실용성정도를 판단할수 있게 되여있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200여개의 성곽들에 대하여 새로 쌓거나 수축한 경위, 동원된 인원수, 성곽과 관련한 전설, 전쟁사실들이 밝혀져있다. 그것은 비단 조선봉건왕조시기뿐아니라 그 이전시기 즉 삼국시기와 고려시기에 쌓은 성곽들에 대해서도 가능한껏 구체적으로 년대를 밝히면서 기록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실례로 평안도 성천의 흘골산성과 무산의 읍성 등에 대한 기록을 들수 있다.
《흘골산성은 서쪽 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둘레가 3 510척이고 높이는 5척임) 【보】 대대로 전하기를 비류왕 송양이 쌓았다고 한다. 비류수가 그 아래를 두르고있는데 고려 태조때에 고쳐 쌓았다. 안에 궁궐의 터가 있다.》*1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둘레가 6 226척이고 높이는 15척인데 녀첩은 840개,문간방은 420개, 옹성은 1개, 포루가 3개임. 동쪽성의 한면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절벽으로서 고을사람들이 모두 동쪽 시내물을 길어다 먹음) 【보】 본조(조선봉건왕조) 숙종 20년(1694)에 쌓았고 영조 33년(1757)에 수리하고 보충하였으며 정조 4년(1780)에 녀첩을 쌓았다.》*2
*1 《증보문헌비고》 권30, 여지고 18, 관방 6, 성곽 6, 평안도 성천 흘골산성
* 《증보문헌비고》 권30, 여지고 18, 관방 6, 성곽 6, 평안도 평양 읍성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 반영된 성곽들에 대한 자료는 우리 나라 성곽들의 규모와 현재 성의 구조 즉 성의 둘레와 높이, 녀장, 성문과 암문, 치성, 익성, 곡성, 문루, 포루, 해자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이면서도 자세하게 전해주고있어 그 사료적가치는 매우 크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다음으로 우리 나라 성곽들의 재질상태에 대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서술되여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옛날부터 산성을 위주로 하여 쌓았는데 그 재료로는 기본적으로 돌을 리용하였다. 그러나 전국각지에 수많은 성을 쌓아야 하였던 조건에서 그 재료로는 흙과 나무도 리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에 의하면 17세기이후 사용하던 성으로서 벽돌로 쌓은 성은 본조(조선봉건왕조) 영조 22년(1746)에 류수 김시환이 벽돌을 구워서 고쳐 쌓은 강도(강화도)의 외성이였다.*
*1 《증보문헌비고》 권26, 여지고 14, 관방 2, 성곽 2, 경기 장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