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려의 명화가 리녕

 2015.9.25.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원래 우리 인민은 문학과 예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있습니다.》(《김정일선집》증보판 제2권 96페지)

우리 민족이 낳은 우수한 예술가들속에는 고려시기 천하의 명화가로 널리 알려진 리녕도 있다. 그는 뛰여난 예술적감각과 우수한 회화적재능으로 하여 12세기 대표적인 풍경화가로서 일화를 많이 남기였으며 이웃나라에까지 그 이름을 날리였다.

리녕은 전주사람으로서 어려서부터 남다른 그림재주를 가지고있었는데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리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그는 그림을 잘 그려 왕궁에까지 소문나 임금의 《총애》를 받으면서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고려 인종(재위 1123-1146)때 왕궁에서 벌어진 일이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사신일행은 인종을 만난 자리에서 여러가지 진귀한 선물들을 바치였는데 그가운데는 기막히게 훌륭한 그림 한폭이 있었다.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던 인종은 그 그림을 보자 순간에 눈빛이 달라졌다.

《이 그림은 우리 나라에서도 아주 걸작으로서 귀중한 보물로 여기고있습니다.》

고려국왕이 대단히 좋아하는것을 본 송나라사신은 그림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게 자랑하였다.

인종은 그림의 수법이 어딘가 낯익어보였으나 송나라사신의 그럴듯한 해설에 끌려들어 좋은 명화를 또 한폭 얻었다고 못내 기뻐하였다. 그는 선물로 받은 이 훌륭한 명화를 자기 혼자 보기가 아까와 여러 사람들을 불러놓고 함께 감상하였다. 그 자리에는 리녕도 있었다.

그런데 그림을 보는 리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 모양을 본 인종은 만족해하며 물었다.

《그대도 이런 명화는 처음 보는게지?》

그러나 리녕의 대답은 뜻밖이였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이 그림은 신이 그린것입니다.》

이번에는 인종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대는 그림을 자세히 보거라. 이 그림은 방금 송나라사신이 그 나라에서 구해다가 바친것이니라.》

《신이 어느 앞이라고 감히 거짓말을 하오리까. 이 그림은 분명 신이 그린것이 틀림없는줄로 아뢰나이다.》

《과연 그렇다면 네 무엇으로 증명할수 있느냐?》

《그림을 신에게 내주시면 이 자리에서 표적을 찾겠습니다.》

인종은 반신반의하면서 그림을 리녕에게 내주었다.

리녕은 그림을 받아들고 한동안 들여다보며 얼굴에 미묘한 빛을 띄웠다. 이윽고 리녕은 그림을 살짝 뒤집더니 그 뒤면에 풀로 붙인 자리를 자신만만하게 뜯었다. 거기에는 과연 리녕의 수표가 또렷하게 새겨진 락관이 있었으며 그가 그림을 그린 래력이 상세히 기록되여있었다.

인종을 깜짝 놀라게 한 이 그림은 바로 《천수사남문도》였다.

천수사는 고려시기 개성 동문밖에 있던 절이였다. 천수사뒤에는 푸른 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앞에는 거울같이 맑은 시내물이 흐른다. 절문에 들어서면 량켠에 수백그루의 나무가 늘어서서 록음을 이루고있다. 강남으로부터 개성으로 오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곳에서 쉬여가므로 천수사의 수림속에서는 언제나 말울음소리와 고기잡이군들의 노래소리, 뒤산에서 나무군들이 부는 피리소리가 그칠새 없었다. 그리고 안개낀 수림사이로는 푸른 기와를 얹고 붉은 단청장식을 한 루각과 정자들이 산천과 어울려있어 수려하였다. 그 아래로 늙은이, 젊은이 할것없이 아름답게 차리고 배회하는속에 울리는 피리며 저대소리, 노래소리는 각별한 흥취를 자아냈다.

리녕은 서정적인 산천경개속에 천수사가 자리잡고 그앞으로 시내물이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을 능란한 필치로 정서있게 그렸던것이다.

언젠가 리녕은 천수사의 절경을 그려서 송나라 상인에게 부친 일이 있었다. 좋은 그림을 구해달라는 고려왕의 부탁을 받았던 사신은 결국 이 그림을 얻어 왕에게 바치였다.

리녕의 스승인 리준은 후배들을 시기하여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있어도 칭찬하는 법이 없었는데 인종이 리녕이 그린 《천수사남문도》를 보여주자 깜짝 놀라면서 《이 그림이 만약 타국에 있었다면 나는 천금을 주고도 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리녕의 재능에 탄복한 사람들은 리녕이 스승의 화법을 뛰여넘어 당대 우리 나라에서 으뜸가는 풍경화의 명수로 등장하였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때부터 리녕은 천하의 명화가로 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인종은 리녕을 더욱 중한 인재로 여기면서 나라에서 그림그리는 일은 모두 그가 주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리녕은 고려사신일행으로 송나라에 가서도 우리 나라 미술의 높은 발전면모를 널리 시위하였다.

1124년에 리녕이 송나라에 고려사신일행으로 갔다가 송나라 휘종의 간청에 못이겨 《례성강도》를 그려준 일이 있었다.

휘종은 그림을 보고 《근래에 고려의 화공들이 사신일행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리녕이 가장 명수이다.》고 감탄하면서 대우를 극진히 하고 많은 비단을 상으로 주었다.

리녕이 그린 례성강은 당시 송나라와의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례성강을 통하여 무역선들이 남송의 항주, 녕파 등지로 자주 래왕하였기때문에 례성강은 송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져있었던것이다.

송나라의 력대왕들가운데서도 산수화에 뛰여난 재능을 가진 휘종은 리녕의 그림솜씨에 크게 감탄하여 자존심도 잊고 그 화법을 자기 나라 궁중화가들에게 배워줄것을 부탁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리녕의 《례성강도》가 아름다운 례성강의 자연풍치를 얼마나 생동하게 잘 묘사한 그림이였는가를 말해주고있다.

현재 리녕이 그린 작품은 남아있는것이 없지만 《고려사》, 《파한집》, 《룡천담적기》를 비롯한 국내외문헌들에 그의 창작활동에 대한 자료와 여러가지 일화가 기록되여있다. 그에 의하면 《례성강도》, 《천수사남문도》밖에도 《산수도》, 《금강산도》, 《진양산수도》, 《송도팔경도》 등이 리녕의 작품으로서 유명하였다고 한다.

리녕은 아들 리광필도 명화가로 키워냈다. 리광필은 명종(재위 1171-1197)때 장군 두경승, 당시 이름있는 문학가이며 재상이던 리규보의 초상을 비롯한 많은 그림들을 그려 당시 화단에서 이름을 날리였다. 명종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 《광필이 없었다면 우리 나라에는 그림의 전통이 거의 끊어졌을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리광필은 명종과도 자주 그림을 같이 그리였으며 그의 총애를 받아 광필의 아들도 젊은 나이에 높은 벼슬을 하였다고 한다.

리녕은 비록 시대적 및 계급적제한성으로 하여 봉건지배계급에게 복무하였지만 자기 조국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간직하고 아름다운 조국의 자연풍경을 재치있게 묘사함으로써 조선민족의 우수한 예술적재능을 내외에 떨친 고려의 명화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