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의 쟝느 다르크-류관순

 2021.5.20.

쟝느 다르크는 영국과 프랑스사이에 벌어진 백년전쟁시기 영국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의 앞장에 서서 오를레앙을 해방하고 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원한 프랑스의 애국처녀이다.

프랑스인민은 오늘까지도 쟝느 다르크를 민족적영웅으로 길이 추억하며 사랑하고있으며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서도 자기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목숨 바쳐 싸운 애국처녀들을 쟝느 다르크에 비유하여 부르고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현대력사에는 류관순이라고 부르는 이름난 순국처녀가 있다.》 (김일성전집》 제97권 312페지)

우리 나라 현대력사에도 우리 인민이 《조선의 쟝느 다르크》라고 부르며 뜨거운 애정을 담아 추억하는 나어린 처녀영웅이 있다.

그가 바로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를 반대하여 일어난 전민족적반일봉기인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순국한 애국처녀 류관순이다.

3.1인민봉기가 일어날 당시 류관순은 리화학당 고등과 1학년에서 공부하고있었다.

그는 경성에서 반일시위가 시작되자 16살의 어린 처녀로서 학생시위대렬의 앞장에 서서 적극 투쟁하였다. 3.1인민봉기의 열파로 학교가 페쇄된 후 그는 고향사람들을 반일투쟁에로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충청남도 천안으로 내려갔다. 그는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학생, 종교인, 유생들을 찾아다니면서 반일투쟁에 나설것을 열렬히 호소하였다.

1919년 4월 류관순은 천안읍 아내장터에 모인 군중앞에서 반일투쟁을 고취하는 선동연설을 한 다음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면서 시위대렬에 뛰여들었다. 일제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류혈적으로 탄압하였다. 그리하여 류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원쑤의 흉탄에 맞아 희생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시위군중의 앞장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그만 일제헌병들에게 체포되였다.

체포된 그는 일제교형리들의 야수적인 고문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내가 사건의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모두 석방하라》고 강경히 주장하여나섰다.

재판정에서도 그는 왜놈의 판사가 심문을 개시하자 그 부당성을 준렬히 규탄하면서 강경히 항의하였다.

그를 굴복시킬수 없었던 일제교형리들은 나어린 처녀에게 7년형이라는 가혹한 판결을 내렸다.

류관순이 받은 형기는 3.1인민봉기를 최초에 선도한 33명의 《민족대표》들이 받은 형기에 비해 볼 때 너무도 가혹한것이였다.

《독립선언서》에 수표한 33명의 《민족대표》들이 받은 형기는 최고 3년에서 최하 1년이였으며 그들중에는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류관순에게 7년형을 언도한것을 보면 일본법정이 16살밖에 안된 어린 처녀를 얼마나 무서운 중범으로 취급하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 때문에 당시 시골의 농부들까지도 7년이면 3.1운동사상 최고의 형량이라고 혀를 내두르며 경악을 금치 못해하였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류관순은 옥중에서도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일제의 죄상을 신랄히 폭로규탄하면서 굴함없이 싸운 류관순의 견결한 투쟁은 청춘도, 생명도 다 바칠지언정 식민지노예로는 되지 않으려는 조선인민의 애국적기상을 그대로 보여준것이였다.

이에 겁을 먹은 일제는 야수적인 방법으로 그를 학살하였다.

류관순의 생애는 너무도 짧았으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꽃나이청춘을 서슴없이 바친 그 애국적소행으로 하여 그는 민족의 사랑을 받는 순국처녀로 되였다.

류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후 우리 민족은 지금까지 줄곧 그를 《조선의 쟝느 다르크》라고 부르며 뜨거운 애정을 담아 추억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