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악한 일제식민지통치자들은 우리 민족을 <황국신민화>하려는 목적하에 <내선일체>니, <동조동근>이니 하면서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민족문화를 유린말살하고 조선인민의 민족정신을 거세하려고 책동하였습니다.》 (
지난날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통치의 전기간 조선인민의 민족정신을 거세말살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대표적실례가 조선의 산야를 싸다니면서 주요개소들에 말뚝(침이라고도 함)들을 박거나 인위적으로 산허리를 끊어놓은 행위들이다.
우리 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이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종산으로, 기본산줄기로 하여 거기로부터 진산, 주산 등의 모든 산줄기들이 뻗어내려갔다고 보면서 그것을 사람의 인체에 비유하여 《혈》이니, 《국》이니, 《맥》이니 하면서 여러가지로 불렀으며 뛰여난 인재나 장수는 산에서 난다고 믿어왔다.
조선사람들의 이러한 관념을 알게 된 일제는 《황국신민화》를 로골적으로 떠들던 1930년대 후반기부터 백두산을 정점으로 하여 뻗어나온 크고작은 조선의 산들에 말뚝들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악랄한 행위를 감행하였다.
개성시의 송악산과 천림산, 지네산과 남포시의 오석산 등 여러 지역에서 발견된 쇠말뚝들은 일제의 이러한 죄악을 보여주는 산 증거로 된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은 마치 누워있는 어머니와 같은 모양이라고 하였다. 송악산은 공중에서 내려다보거나 판문구역쪽에서 보면 만삭이 된 녀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누워있는 모양처럼 보인다.
사진 1은 송악산(해발높이 490m)정점의 바위에 박혀있는 1대의 기본쇠말뚝, 그를 타원형으로 둘러싼 1대의 보조쇠말뚝, 보조쇠말뚝들이 박혀있던 8개의 구멍이다. 이 바위는 산전체를 인체에 비유하여 볼 때 누워있는 녀인의 가슴부위에 해당된다고 본다.
현재 쇠말뚝이 박혀있는 정점바위로부터 300m정도 떨어져있는 바위에도 3대의 쇠말뚝이 박혀있다. 이 바위의 위치는 인체적으로 볼 때 사람의 배꼽부위에 해당된다고 볼수 있다. 여기에서 발견된 쇠말뚝들의 길이는 1m정도이고 끝은 뭉툭하다. 현재 제거된 쇠말뚝들중 1대는 개성시계급교양관에, 1대는 황해북도계급교양관에, 1대는 중앙계급교양관에 소장되여있다.
사진 2는 바위가 많이 드러나 바위산으로 알려진 개성시 천림산(해발높이 762m)봉우리에 있는 바위의 우묵하게 패워진 곳에 3각형모양으로 박혀있는 3대의 쇠말뚝이다.
사진 3은 역시 천림산봉우리의 바위(밑에는 아찔한 낭떠러지임)에 3개의 쇠말뚝이 박혔던 구멍이다.
사진 4는 개성시 천림산 룡마바위 대가리부분에 쇠말뚝이 박혔던 구멍이다.
천림산줄기에는 룡마바위(혹은 룡바위)라고 불리우는 큰 바위가 있다. 고려의 시조왕 왕건이 타고다니던 말이 바위로 굳어졌다는 전설로부터 그렇게 불리워왔다. 일제는 바로 말전체를 형상한 룡마바위에서 핵이라고 할수 있는 대가리의 멱부분에 3대의 쇠말뚝을 박았던것이다.
사진 5는 개성시 숭전동에 있는 지네산 신선바위의 선남바위에 박혀있는 쇠말뚝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이 산에 천년묵은 큰 지네가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는데 마을의 한 처녀로부터 은혜를 입은 두꺼비가 지네를 죽이고 처녀와 마을을 구원하였다고 산이름을 지네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네산의 신선바위는 선녀바위와 선남바위로 되여있다. 쇠말뚝은 원래 선녀바위에 1대 박혀있고 선남바위의 목부위에 2대가 박혀있었는데 현재는 선남바위에 길이 50㎝정도 되고 끝이 뭉툭한 쇠말뚝 1대가 박혀있다.
일제는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뿐 아니라 우리 나라 도처의 별로 이름없던 산들에도 쇠말뚝들을 박는 행위를 감행하였다.
사진 6은 일제가 남포시 온천군과 룡강군의 경계에 있는 오석산(해발높이 566m)의 정점에서 3~4m정도 아래에 있는 바위에 박혀있던 ㄴ형강모양의 쇠말뚝으로서 쇠말뚝의 로출된 길이는 20cm, 직경은 5cm정도이다. 일제는 임진조국전쟁시기의 애국명장인 김응서를 배출한 룡강의 오석산에 이런 쇠말뚝을 박아놓고 이제는 이곳에서 큰 장수나 인물이 나오지 못할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2014년에 발견제거된 이 말뚝은 현재 중앙계급교양관에 전시되여있다.
조선의 곳곳에 말뚝들을 박아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책동에서 일련의 특징들을 찾아볼수 있다.
특징은 우선 조선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책동이 몇몇 개별적일본인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정부의 시책으로 감행되였다는것이다.
그것은 일제가 박아놓은 말뚝이 우리 나라 일부지역이 아니라 전반적인 지역들에서 발견된것을 통하여 알수 있다. 현재까지 일제가 박아놓은 말뚝발굴정형을 보면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의 수도였던 개성과 같은 주요지역들과 명산들은 물론 남포시의 재장산이나 오석산과 같이 평범한 지역들과 그리 높지 않은 산야들, 지어는 절간의 바위굴, 땅속에서까지 말뚝들이 발견되였다.
그리고 쇠말뚝을 박기 위한 책동에 많은 로력과 자재가 필요하였다는 사정을 놓고도 알수 있다. 산중의 암반에 구멍을 뚫고 쇠장대들을 박으며 세멘트, 류황 등을 혼합하여 다시는 뽑을수 없게 다짐하는것은 제작과 운반, 시공과정을 놓고 볼 때 결코 한두사람이 동원되여서는 할수 없는 작업량인것이다.
특징은 또한 일제가 저들의 민족정기말살책동을 철저히 은페하였다는것이다.
그것은 현재까지 《조선총독부관보》를 비롯한 식민지통치관계문서나 일본국내의 문서들에도 조선에서 말뚝들을 박는것과 같은 민족정기말살책동을 립증하는 자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데서 알수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일제의 책동은 주로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 또는 그에 대하여 전해들은 후대들의 말을 통하여 그리고 우연하게 발견된것이 대부분이다. 이를 통하여 일제가 식민지통치시기 조선의 민족정기말살을 주요한 정책으로 내세우고 전국적범위에서 이러한 행위를 감행하면서 철저히 비밀에 붙여왔다는것을 알수 있다.
모든 사실은 일제야말로 조선인민의 민족성을 깡그리 말살하기 위하여 세계식민지통치사상 류례없는 악랄한 행위도 서슴치 않은 우리 민족의 천년숙적이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