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강토에 독립만세의 함성이 메아리치던 거족적인 3.1인민봉기가 일어났던 때로부터 어언 101번째의 년륜을 아로새겼다.
《3.1인민봉기를 통하여 조선사람들은 우리 인민이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정신이 강한 인민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가진 인민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과시하였다.》 (
3.1인민봉기에서 과시된 우리 인민의 민족자주정신은 우선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그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를 보여준데서 찾아볼수 있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나라를 통채로 빼앗긴 우리 인민에게 있어서 독립정신은 곧 민족자주정신이였다.
3.1인민봉기에서 우리 인민이 나라를 찾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조선민족의 불굴의 기개 다시말하여 씩씩한 기상과 굽히지 않는 의지를 발휘할수 있은것은 강한 독립정신 즉 민족자주정신을 지니고있었기때문이였다.
열렬한 독립정신을 지닌 우리 인민들의 높은 정신상태와 그로부터 발현된 씩씩한 기상에 대해 일제의 한 기록에는 《독립이라는 말을 들은 군중은 놀랍고 이상스럽다는듯 눈을 번쩍이였다. …선언서의 랑독이 끝나자…공원안팎에서는 독립만세소리가 높이 울렸다. 이 소리는 또한 동대문으로부터 서대문에 마주쳐울리였으며 종로로부터 남대문에 련결되여있는 군중들로 하여금 모두 열광적으로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라고 씌여있다.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침략자들과 맞서 싸울 때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는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한목숨 바쳐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불굴의 의지를 지닌데로부터 3.1인민봉기참가자들은 총칼로 무장한 일제의 잔악무도한 폭압에도 굴함없이 죽음을 맞받아나갈수 있었다.
3월 3일에 평양에서 일어난 두번째 시위에 참가한 군중들이 서문안으로 진출하였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해 나선 일제침략군은 그 기상에 위압되여 쩔쩔매면서 격노한 시위대오를 멈춰세우지 못하였다. 당황한 놈들이 총까지 쏘아대면서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려고 날뛰였지만 군중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탄압에 맞서 치렬한 격투를 벌리였다.
죽음을 각오한 대중의 이러한 투쟁은 전국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
수많은 인민들이 적수공권으로 싸운것으로 하여 놈들의 총칼에 맞아 더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감옥으로 끌려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인민들은 피흘리며 쓰러질지언정, 감옥에 끌려가 놈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할지언정 씩씩한 기상과 견결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순국처녀 류관순은 죽을지언정 버리지 않을 자신의 독립의지를 담아 고향사람들앞에서 다음과 같은 선동연설을 하였다.
《지난 3월 1일에 우리들은 자주독립국가이라는것을 선언하여 독립만세의 웨침이 마을마다 전해졌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뒤떨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모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그후 그는 감옥에 끌려가서도 자신의 독립의지를 굽히지 않고 만세를 부르며 용감히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죽을지언정 나라의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불굴의 기개를 보여준것은 결코 류관순만이 아니였다.
어느 고등보통학교의 녀학생은 일제경찰에 체포된 후 놈들이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온몸을 지지고 사지를 칼로 베는 등 형언할수없이 악착한 고문을 가하면서 그래도 만세를 부르겠는가고 묻자 《독립이 성공할 때까지 죽어도 그만두지 않겠다.》고 대답하였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투쟁대렬의 앞장에 섰던 한 농민은 놈들의 칼에 맞아 한팔이 떨어져나가자 대오에서 물러선것이 아니라 머리에 동여맸던 흰 수건에 자기의 붉은 피를 물들여 기발처럼 흔들며 침략자들을 맞받아 씩씩하게 나갔다.
이렇게 3.1인민봉기에 떨쳐나선 수많은 인민들이 오직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열렬한 독립정신을 지니고 원쑤의 총칼앞에서도 용감히 싸웠으며 조선민족의 불굴의 기개를 힘있게 과시하였다.
3.1인민봉기에서 과시된 우리 인민의 민족자주정신은 다음으로 전민족의 거족적인 항거로 열렬한 애국심을 보여준것을 통해서도 명백히 알수 있다.
민족자주정신이 강한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것은 그 실현을 위해 민족의 모든 성원들이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얼마나 헌신적으로 투쟁하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설사 몇몇 개별적인 사람들이 높은 애국정신을 지니고 나라를 위해 영웅적인 행동을 하였다고 하여 결코 자주정신이 강한 민족이라고 말할수 없다.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수 있는 거족적인 력량이 나라를 위한 일에서 헌신성과 희생성을 발휘할 때 그런 민족이야말로 민족자주정신이 강하다고 떳떳이 말할수 있다.
3.1인민봉기는 가혹한 일제식민지통치에 대한 우리 인민의 쌓이고쌓인 울분과 분노의 폭발로서 각계각층을 망라하는 광범한 대중이 궐기해나선 전민족적인 투쟁이였다.
자료에 의하면 3월 1~10일기간에만 하여도 전국적으로 346만 5 000명의 각계각층 인민들이 반일봉기대렬에 참가하였으며 12월까지 전국각지에서 최소한 3 200여회의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
지금처럼 현대적인 정보통신수단이 없었던 당시의 실정에서 이처럼 짧은 기간에 민족의 다수를 이루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누구의 명령이나 지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빼앗긴 나라의 운명을 건지겠다는 열망을 안고 스스로 총칼이 앞을 가로막는 투쟁대오에 떨쳐나선다는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 민족이 나라를 위한 일에 제 한몸을 아끼지 않는 애국정신이 강하였다는것을 말해주는것이다.
3.1인민봉기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된 사람들가운데는 로동자, 농민, 청년학생은 물론 상인, 회사원, 종교인, 교원, 의사들, 심지어는 일제식민지통치 말단기관에 복무하던 면서기, 리장들까지도 있었다.
지어 사회적으로 천한 신분으로 되여있는 시골의 기생들까지도 투쟁대오에 합세하였다.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참을수 없는 모욕과 멸시를 숙명처럼 감수해온 진주지방의 기생들은 기생독립단을 뭇고 《조선독립 만세!》를 웨치면서 시위투쟁에 나섰으며 어느 한 기생은 막아나서는 수십명의 경찰들앞에 나서 《내가 죽어서 나라의 독립을 얻게 되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하면서 투쟁참가자들을 고무하여 시위대오가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나가도록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이뿐만아니라 3.1인민봉기에는 나이에 관계없이 늙은이들과 어린 아이들까지 합세해나섰다.
일제에 의하여 체포된 사람들가운데 18살미만의 미성년이 1 000여명을 헤아리고 60살이상의 로인들도 1 100여명이였다는 사실은 3.1인민봉기가 나이에 구별없이 로소를 불문한 전민족적인 애국투쟁이였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3.1인민봉기는 일어난 지역의 범위를 놓고보아도 국내는 물론 조선사람들이 살고있는 중국, 로씨야, 하와이를 비롯한 해외지역까지 포괄하는 방대한 규모에서 벌어진 투쟁이였다.
조선국내에서 일어난 3.1인민봉기의 소식에 접한 중국동북지방에서 살던 조선사람들은 비록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몸은 멀리 타향에 와있지만 나라를 위하는 애국의 마음만은 변치 않고 결연히 투쟁에 일떠섰다.
실례로 3월 13일 중국동북지방의 룡정에서 3만여명의 군중이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북을 치면서 시위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투쟁은 훈춘, 안도, 화룡, 왕청, 연길, 심양, 장백, 류하, 관전, 안동, 녕안 등 중국동북지방의 넓은 지역에서 광범히 전개되였다.
또한 로씨야의 연해주지역에서도 일제헌병들과 백파도당의 탄압과 방해책동을 물리치고 대중적인 반일시위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 민족이 설사 만리타향에 떨어져있어도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한몸바치려는 열렬한 애국정신으로 충만된 훌륭한 인민이라는것을 힘있게 과시하였다.
하기에 3.1인민봉기를 목격한 한 유럽인은 중국신문인 《상해대륙보》에 올린 자기의 글에서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고 손에는 기발을 흔들며 침략자의 총검앞에서도 굴함없이 싸우는 조선인민들의 장하고
이처럼 3.1인민봉기는 우리 민족이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독립정신이 강한 인민이라는것을 뚜렷이 보여줌으로써 조선민족의 자주정신을 힘있게 과시한 투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