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교육제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는 공장전문학교, 공장대학, 농장대학, 어장대학, TV방송대학이 속하며 대학들에 통신 및 야간학부가 있다. 또한 간부양성 및 재교육체계가 있으며 그밖에 공장들에 설치되여있는 기능공양성체계들이 있다.
《우리 당은 자라나는 새 세대들뿐아니라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자들과 전체 인민을 빠짐없이 공부시키는 원칙에 따라 학업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체계와 함께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를 내왔으며 그것을 현실발전의 요구에 맞게 끊임없이 발전시켜왔다.》 (
지난날 일제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식민지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인민의 민족자주의식을 말살하고 인민들을 무지와 몽매속에 얽매여두려고 식민지노예교육을 강압실시하였다.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제도는 우리 인민에게 배움의 길을 가로막고 지주나 자본가, 친일주구 등 권세있는 놈들의 자식들과 저들의 식민지통치에 필요한 심부름군을 길러내기 위한 반인민적이며 반동적인 교육제도였다.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는 학업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 전문학교들이 널리 신설확장되여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키우고있었다.
그러나 워낙 인재가 부족했고 또한 민주건설이 빨리 진척됨에 따라 간부문제는 의연히 긴장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생산과 건설을 뒤로 미루고 민주건설의 각 분야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생산활동과 본신사업에서 떼내여 정규학교에서 전문적으로 공부만 시킬수는 없었다.
더우기 지난날 일제식민지통치로 말미암아 배우지 못하였던 근로자들이 있고 학업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체계의 규모가 제한되여있으며 교육사업과 민주건설을 동시에 밀고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던 조건에서 학업을 전문으로 하는 교육체계만으로는 전민교육을 성과적으로 실현해나갈수 없었다.
문제는 혁명과 건설을 계속 힘있게 밀고나가면서 인재문제를 동시에 원만히 해결하며 새 사회의 주인으로 된 수백만 근로자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줄수 있는 근본방도문제를 풀어야 하였다.
이 절박하고도 중요한 요구를 깊이 통찰하신
무엇보다도 교육일군들과 물질적토대가 비교적 잘 꾸려진 주간대학들에 야간대학과 통신대학을 병설하는 방법으로 야간, 통신교육망을 늘이도록 하시였다.
이 조치는 교원문제와 실험실습조건 등을 보다 손쉽게 해결하고 대학의 교육과학력량과 교육시설을 분산시킴이 없이 대학창설의 예비와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동원리용할수 있게 하는 정당한 조치였다.
주체37(1948)년 2월과 8월에
이로써 주체37(1948)년에 벌써 우리 나라에는 3개의 야간대학(20개 학급)과 4개의 통신대학(82개 학급)이 창설되였다. 이 대학들에서는 4 977명의 근로자들이 일하면서 공부하고있었다. 그 가운데서 통신대학생이 4 267명이나 되였다. 이것은 실로 일하면서 배우는 고등교육체계의 발전에서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커다란 사변이였다.
야간 및 통신고등교육망은 계속 늘어나 주체38(1949)년 9월에 평양사범대학부속 야간교원대학이,주체39(1950)년초에는 원산교원대학에 통신교원대학이 나왔다.
주체39(1950)년초에 이르러 3개의 야간대학과 5개의 통신대학들에서 6 015명의 학생들이 배우고있었다. 이것은 당시 우리 나라 대학생총수에서 일하면서 배우는 대학생수가 3분의 1을 차지한것으로 된다.
이처럼 일하면서 배우는 야간 및 통신고등교육망이 급속히 늘어남으로써 지난날 배움의 길을 잃고 학교문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근로청년들과 일군들이 자기 초소를 떠남이 없이 고등교육까지 받고 일정한 분야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소유한 민족간부로 믿음직하게 준비될수 있게 되였다.
또한 야간, 통신고등교육망과 함께 일하면서 배우는 중등기술교육망을 늘이기 위한 사업이 힘있게 추진되였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중등기술교육망을 늘이는것은 로동자와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자들에게 지식과 기술을 배울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주며 민주건설사업에서 모든 문제의 초점으로 되고있는 기술인재문제를 빨리 풀어나갈수 있는 효과적인 방도의 하나였다.
이 조치에 따라 공장, 기업소, 농사시험장들에 3년제의 직장기술학교와 3~4년제의 직장기술전문학교들이 널리 조직되였다. 주체36(1947)년에 우선 3개의 직장기술전문학교(12개 학급)와 7개의 직장기술학교(32개 학급)가 설치되여 각각 401명과 2 033명의 근로청년들을 받아들였다.
창설된 직장기술전문학교와 직장기술학교는 일하면서 배우는 중등기술교육기관으로서 그 첫걸음부터 우월성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빨리 발전하였다.
주체38(1949)년말에 이르러 직장기술전문학교는 17개나 되고 그 학생수는 4 353명에 달하였다. 이해말 현재 직장기술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1만 940명으로서 주체36(1947)년 직장기술학교 학생수에 비하여 무려 27배에 달하였다. 그밖에 주체38(1949)년말 7개의 통신사범전문학교에서 4 926명의 학생들이 공부하고있었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주체36(1947)년도부터 초급기술일군(준기수)을 양성하는 직장기술학교로부터 기사, 전문가를 길러내는 대학에 이르기까지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망이 급속히 늘어났으며 그것은 우리 나라 민족간부양성기지축성과 기술인재양성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였다.
야간, 통신교육기관과 함께 산업부문의 기업관리간부들을 양성하는 재교육망을 설치하는 사업도 적극 추진되였다.
주체39(1950)년 2월 1일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사업은 당과 국가의 관심속에 전시에도 계속되였다. 언제나 민족간부양성문제를 혁명의 전도와 민족의 장래운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로 보시고 그에 선차적의의를 부여해오신
황해제철소에 송림공업대학이, 흥남비료공장에 흥남공업대학이 창설된것을 비롯하여 강선제강소, 희천공작기계공장 등 대규모공장, 기업소들이 있는 곳에 24개의 공장대학이 신설되여 주체49(1960)년 9월 1일부터 개교하였으며 5 000여명의 근로자들이 첫 신입생으로 되였다.
이리하여 가렬한 조국해방전쟁의 불길속에서 주체40(1951)년에 창설된 공장대학은 정연한 체계를 이루게 되였으며 공장대학체계로 완성되게 되였다.
공장대학과 함께 공장고등기술학교가 수많이 설립되여 주체49(1960)년 당시 건설된 공장고등기술학교수는 47개에 달하였다.
이와 함께 야간대학과 통신대학의 수도 늘어나 가능한 모든 기술대학들에 야간학부들이 설치, 운영되였으며 주체48(1959)년의 12개로부터 주체49(1960)년에는 36개로, 통신대학의 수도 주체49(1960)년에 36개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주체49(1960)년에는 대학생총수 가운데서 일하면서 배우는 대학생수는 그 절반을 넘는 4만 9천여명에 이르렀다.
당제4차대회를 계기로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를 개선강화하기 위한 사업은 더욱 힘있게 벌어져 이전에는 재직일군으로 기사, 전문가가 3 157명밖에 양성하지 못하였다면 주체57(1968)년말에 와서 그 수는 6 631명으로 급격히 늘어났으며 특설학부를 통하여 539명, 통신재직간부반을 통하여 699명이 양성되여 각 부문에서 유능한 지휘성원으로 복무할수 있게 되였다.
이렇듯
1980년대에 이르러 우리 나라에서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는
주체70(1981)년 12월 1일 우리 나라에서의 첫 농장대학인 청산농업대학이 개교식을 진행한데 이어 주체76(1987)년 12월 평안북도 운전군에 운전농업대학, 주체77(1988)년 12월에는 연백농업대학과 정평농업대학이 창립되였다.
특히 주체71(1982)년 9월 1일 TV방송대학이 개교하여 첫 강의를 성과적으로 방영하였다. TV방송대학에서는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에 망라된 대학통신학생들을 기본대상으로 하여 기초과학과목들과 외국어에 대한 방송강의를 하였다. TV방송대학이 창립된 후 대학통신학생들이 있는 전국의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을 비롯한 수많은 단위들에서 학습반들이 조직되고 TV가 설치된 강의실을 마련하여 학생들에게 필요되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공급해주는 등 강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들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주체73(1984)년에만 하여도 37개의 대학에 700여개의 강의시청장이 꾸려져 5 200여명의 대학통신학생들이 강의를 정상적으로 받을수 있게 되였다.
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의 발전력사는 그대로 우리 근로자들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