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학은 우리 선조들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민족의 귀중한 유산입니다.》 (
고려의학은 우리 나라에 풍부한 약재자원과 침, 뜸, 부항 등 독특한 방법으로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는데 크게 이바지한 우리 민족의 전통의학이며 귀중한 유산이다.
고려의학은 의학리론과 치료법에서 다른 동방나라들의 민족의학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특성을 가지고있을뿐아니라 우리 인민의 생활습성과 신체구조에 맞게 발전시켜온 민족의학이며 귀중한 의학유산이다.
이러한 고려의학은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시기에 와서도 변화된 사회력사적환경에 맞게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고려의학의 발전은 침구학책인 《황제침경》과 《제중립효방》, 치료법을 간명하게 적은 《어의촬요방》, 우리 나라의 고유한 약재를 가지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쓴 《향약구급방》, 《삼화자향약방》, 《향약간이방》, 《향약혜민경험방》 등 대표적인 의학도서들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조국산천에서 나는 여러가지 약재와 독특한 방법을 리용하여 각종 질병치료에 대한 처방을 밝힌 의학책들이 련이어 편찬, 간행된것은 고려의학을 발전시키고 병치료에 적극 활용하기 위한 인민들의 창조적로력과 지향의 결실이였다.
이렇게 고려의학이 적극 탐구되고 발전되는 과정에 많은 명의들도 배출되였다.
그중에는 고려의 2대명의로 불리우는 설경성과 리상로도 있었다.
설경성(1237-1313년)은 고려는 물론 원나라에까지 잘 알려진 명의였다.
설경성은 대대로 의술을 업으로 삼고있는 경주(계림)의 어느 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는데 자칭 설총의 후손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조들의 뒤를 이어 어려서부터 의학을 배웠으며 의사가 된 후 병치료와 의학연구에 전력하여 당시의 림상의학에 정통하게 되였다.
의술에 능한것으로 하여 그는 상약의좌(왕에게 필요한 약을 조제하는 일을 맡은 상약국의 정9품벼슬)라는 벼슬에 처음으로 등용되게 되였고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동지밀직사사(국왕의 명령을 하달하고 궁궐을 호위하며 군사관계의 기밀을 맡은 밀직사의 종2품벼슬)까지 되였으며 마지막에는 지도첨의사사로 전직되였다가 벼슬을 그만두었다.
설경성이 당시의 재능있는 의원으로 인정받고있었으므로 경효왕(충렬왕, 1275-1308년)은 병에 걸릴 때마다 반드시 설경성에게서 치료를 받군 하였는데 이때로부터 그는 국왕의 신임과 총애를 받게 되였으며 명의로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이처럼 설경성은 의원가문에서 출생하여 일생동안 의학연구와 치료에 전심함으로써 국내는 물론 다른 나라에까지 특출한 명의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리상로(1123-1197)는 고려시기 침구학발전에 크게 기여한 재능있는 의사였다.
리상로는
류배지에서 그는 어른이 될 때까지 술친구들을 따라다니면서 방황하다가 우연히 중생활을 하는 한 의학자를 만나 그로부터 침술을 배우게 되였다.
그후부터 그는 뛰여난 침구술을 습득한것으로 하여 명의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수도에 올라와 어느 한 관리의 병을 고쳐주어 수도에서도 명성이 자자하게 되였다.
때마침 의종(1147-1170)이 발에 병이 생겨서 고치지 못하여 고심하던 차에 그의 이름을 듣고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이였다. 리상로는 여러 의원들이 무진 애를 써서도 고치지 못하였던 국왕의 병을 침으로 완전히 낫게 하였다.
의종은 너무 기뻐 그에게 많은 비단을 상으로 주고 량온령(정8품)이라는 관직에 임명하여 내전에 있게 하였다.
몇해 지나서 리상로의 관직이 오르고 그에 대한 국왕의 총애와 사람들의 신망이 높아지자 부패무능한 봉건관료들은 그를 시기하던 나머지 농민폭동군과 내통했다는 터무니없는 반역죄를 씌워 그를 섬으로 정배살이 보내였다.
귀양지에서도 리상로는 자기의 재능과 기술을 부단히 련마하였다.
국왕은 그의 의술이 독특하고 실용적인것으로 하여 그를 다시 등용하여 왕궁에 있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리부상서의 벼슬까지 주었다.
리상로는 꾸준한 노력으로 침구술을 익히고 그것을 독특하게 발전시키였으며 뛰여난 침구술로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줌으로써 당대의 재능있는 의사로, 고려시기의 2대명의로 이름을 날리였다.
설경성, 리상로와 같은 명의들은 우리 나라 고려의학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내외에 널리 시위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