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일본제국주의침략자들은 우리 나라의 가는곳마다에서 수많은 고적들을 닥치는대로 마사버렸으며 귀중한 력사유물들을 많이 빼앗아갔습니다.》 (
일본은 지난날 조선에서 수많은 문화재들을 닥치는대로 략탈해갔을뿐아니라 오늘까지도 그것을 저들의 국보로 뻐젓이 전시해놓고있다.
일본의 이러한 파렴치한 행태는 인류문명에 대한 엄중한 도전이며 도저히 용납 못할 반인륜적인것으로서 일본의 도덕적저렬성의 실태를 그대로 보여주고있다.
일본의 날강도적인 문화재략탈에 의하여 고려시기는 물론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창작된 미술작품들이 지금도 일본땅에 수많이 소장되여있다.
최근 일본에서는 네랑국립박물관의 주최로 2019년 7월 14일부터 8월 26일까지 동아시아 고대자수불화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알려져있지 않았던 15세기 창작된 우리 나라의 자수불화작품인 《금직3존백체불도》(金織三存百體佛圖)가 전시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자수(색실로 수를 놓고 짠 천)불화는 족자형태로 되여있는데 재질은 비단천이며 불교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고있다.
자수불화의 길이는 247.5cm이고 너비는 76.3cm로 되여있다.
이 작품은 원래 일본 교도선사라는 절에 소장되여있었던것이라고 한다.
작품에 새겨진 글의 내용을 보면 조선봉건왕조의 제7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년)와 왕비 그리고 왕세자의 《안녕》을 위해서 만들어진것으로 되여있다.
자수불화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나온 불화가운데서 력사가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인정되고있다.
그러면 이 자수불화의 제작년대와 자수불화를 만든 주인공은 누구인가 하는것이다.
자수불화의 하단에 새겨진 기록에 의하면 불화가 만들어진 시기는 1463년이다. 그것은 자수불화에 《천순 7년》이라고 새겨진 글을 통해서 알수 있다. 《천순》은 명나라 황제 영종의 년호로서 이 년호는 1457년부터 사용되였다. 그러므로 《천순 7년》은 1463년이고 이해는 세조가 즉위한지 9년째 되는 해이다.
작품을 구체적으로 보면 족자의 웃부분에는 석가3존상이 수놓아져있고 중 가운데부분의 련꽃우에는 수많은 작은 불상들인 《백체불》(글에는 100개의 불상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95개이다)이 수놓아져있다. 그리고 백체불의 밑부분에는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바라는 문구가 적혀져있다.
이 자수불화를 만든 주인공은 세조의 친누이인 정의공주(1415-1477년)인데 그것은 불화에 수놓은 글자를 통해서 알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는 세조의 남동생 영웅대군을 비롯해서 여러명의 왕실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자수불화에서 주목되는것은 세종의 둘째딸이며 세조의 친누이인 정의공주가
이러한 사실들은 정의공주가 《훈민정음》창제에도 적지 않게 관여하였으며 세조와 같이 독실한 불교신자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그러면 당시 이 불화가 어떤 목적에서 만들어졌는가 하는것이다.
그것은 우선 세조의 불교장려정책과 관련되여있다고 볼수 있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배불숭유》정책에 의하여 불교가 상당히 배척되여있었지만 세조는 이와는 반대로 불교를 특별히 장려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세조(이름 리유; 1417-1468년)는 세종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였다.
세조는 세종시기에 불교를 해독하는 일에 관여하였으며 왕이 된 다음에는 왕궁안에 사찰을 두고 승려들을 왕궁으로 끌어들여 불교교리를 전파시키도록 하였다. 특히 그는 왕으로 있던 1458년에 대장경 50부를 인쇄하여 전국각지에 있는 큰 절들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세조의 이와 같은 불교장려정책은 친누이인 정의공주에 의하여 자수불화로 남겨졌다고 본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력사를 보면 불교를 믿는 왕들을 위해서 자수불화가 만들어졌다는 기록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있다.
그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후기신라시기 애장왕(재위; 800-809년)때 《불교행사에 수놓은 비단을 사용》하였다는것과 권근의 《양촌집》에 고려의 제31대왕인 경효(공민)왕의 왕비인 로국공주와 조선봉건왕조 제3대왕인 태종의 비 원경왕후가 화려한 자수불화를 만들었다는 기록들을 통해서 알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자수불화는 불교를 장려하는 시기에 왕궁에서 적지 않게 만들어져 사용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 자수불화도 그러한 관례를 따른것이였다고 볼수 있다.
그것은 또한 세조가 자기 조카의 《명복》을 빌자는데도 있었다고 볼수 있다. 1455년 6월에 세조는 자기 조카 단종을 왕자리에서 내쫓고 왕이 되였다. 세조가 조카의 왕권을 빼앗은것으로 하여 적지 않은 관리들속에서는 이것이 유교적립장과는 상반되는 현상이라는 비난의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특히 성삼문을 비롯한 관리들속에서는 이것은 《군자의 행동》이 아니라고 하면서 왕권을 빼앗은 세조를 죽이고 단종의 왕권을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강화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종에게 왕권을 복귀해주려는 계획을 실현하지 못하고 오히려 계획이 탈로되여 죽음을 당하였으며 《사6신》사건으로 력사에 기록되였다.
세조는 조카 단종을 죽이고 이른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이 자수를 자기의 누이에게 부탁하였다고 본다.
그것은 자수불화에 《삼도》(三塗)가 새겨져있는것을 보고 잘 알수 있다. 《삼도》는 불교에서 생시에 못된짓을 한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이른바 《지옥》, 《아귀》, 《축생》을 이르는 말이다.
물론 이번에 일본에서 알려진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자수불화는 그 내용에서 불교교리로 일관되여있지만 비단천에 화려한 색실로 인물들의 형상을 생동하게 보여주고있는것으로 하여 전문가들속에서는 이 작품이 미술사적으로 볼 때 보기 드문 명작이라고 평가되고있다.
그러면 이 자수불화가 어떻게 일본땅에 소장되게 되였는가 하는것이다.
그 구체적인 내막은 자료의 부족으로 잘 알수 없지만 임진조국전쟁시기 혹은 일제의 조선강점시기에 략탈당하였다고 본다.
현재 대다수의 섬나라족속들은 조선에서 창작된 불교유산들이 류실되게 된 책임이 다름아닌 조선사람들자신에게 있는듯이 사실을 오도하고있다.
대표적으로 미야께라는자는 《단 한번의 혁명(갑신정변-인용자)으로 조선봉건왕조이전시기의 불교미술품은 거의나 다 없어졌다.》고 하면서 그 원인은 《조선민족에게 있어서는 옛 물건을 보존하는 관념이 전통적으로 결핍되여있기때문이다.》라는 궤변을 늘여놓았고 어느 한 미술관 관장이였던 스에마쯔도 《전쟁 등 때문에 인멸》되였던듯이 조선에 책임을 전가시키고있다.
이것은 조선에서 불교유산들이 없어진것이 일본과는 무관계하다는 섬나라족속들의 후안무치한 관점에서 출발한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불교유산들이 일본에 있어서 《수량은 오히려 조선국내의것보다 더 많다.》고 하면서 그 원인은 《계속되는 외적의 침략에 의한 전란》때문이며 특히는 일본의 침입을 중요한 원인의 하나로 제기한 어느 한 일본인의 솔직한 말과 《조선의 불교미술에 대해 연구하려면 일본에서만 할수 있을 정도이다.》라고 한 일본미술계의 반향은 이들의 말이 진실과는 다르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상의 사실들은 자수불화가 류실되게 된 책임이 전적으로 일본에 있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이것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창작된 자수불화의 비참한 운명의 한 토막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불교유산뿐아니라 우리 민족이 창조한 모든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조선에 반환하는것이 국제법적의무로 보나 도덕적견지에서 보아도 마땅한 의무라는것을 이제라도 자각하고 철저히 배상해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