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 조선민족멸살을 공공연히 떠벌이면서 일제가 감행한 우리 인민에 대한 대량살륙만행에는 패망직후 일본의 마이즈루항앞바다에서 저지른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도 뚜렷이 기록되여있다.
《우리는 지난날 일본놈들이 조선사람을 어떻게 멸시하였고 야만적으로 학살하였는가를 잘 기억하고있습니다.》 (
일제가 패망한지 열흘도 채 못되였던 1945년 8월 24일 17시 20분경 교또부 마이즈루항입구의 바다 한가운데서 전 일본군해군수송선 《우끼시마마루》가 요란한 폭발소리와 함께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패망한 일제가 감행한 극악한 조선인집단학살만행이였음을 사람들은 얼마간의 시일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였다.
그 배에는 암담했던 일제의 식민지파쑈통치시기에 부모처자들과 생리별하고 고국산천을 떠나 왜나라땅에서 갖은 민족적멸시와 고역을 강요당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수천명의 조선사람들이 타고있었다.
폭침당시 일본당국은 작성된 승선자명부에 따라 그 수를 3 735명이라고 발표하였으나 그 배에 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승선자수가 최소 7 000명이상이나 되였다.
1945년 8월 22일 22시 혹까이도와 아오모리현의 군사기지건설장들에서 노예로동에 시달려온 조선사람들은 아오모리현을 떠나 부산으로 간다는 《우끼시마마루》에 너도나도 몸을 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탄 배를 폭파함으로써 귀향길에 오른 조선사람모두를 수장시켜버리려는 일제의 치떨리는 살인흉계가 이미 꾸며져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오미나또의 군항을 떠난 《우끼시마마루》는 일본의 서부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가 해군군항인 마이즈루항가까이에 이르러 물을 싣겠다는 리유를 내걸고 배머리를 항입구로 돌렸다.
얼마동안 전진하던 배의 밑창에서 갑자기 《꽝!》하는 3~4차례의 요란한 폭음이 울리는것과 때를 같이하여 배는 두동강으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수많은 승객들이 배와 함께 검푸른 바다밑으로 사라져버리고말았다.
일본당국은 사건이 발생하자 그것을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불가피한 사고》였다고 날조된 《보고》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결코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였다.
그것은 해방의 기쁨과 환희에 넘쳐있던 조선사람들의 기를 꺾어놓아 패망의 분풀이와 앙갚음을 하며 특히는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강제련행하여 일본땅에서 감행한 반인륜적인 범죄행위의 목격자들을 없애버림으로써 범죄의 책임에서 벗어나는것과 함께 군사대상물건설의 비밀을 영원한 흑막속에 묻어버리려는데 목적을 둔 패전한 일본정부와 군부의 모략의 산물이였다.
당시 오미나또해군경비부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던 조선사람들에게 《우끼시마마루》가 부산으로 가는데 조선에 가는 배편은 이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모두 이 배에 타라고 회유하였으며 일부 승선자들이 배가 니이가다에까지 가서 폭침한다는 소문에서 위험을 직감하고 승선을 거부하자 《오미나또에 있는 조선사람들은 모두 귀국하라. 돌아가지 않으면 쌀공급을 중단한다.》고 하면서 위협적으로 귀환을 강박하였다.
결국 4 730t급의 배는 정원수의 몇배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출항의 닻을 올리게 되였던것이다.
《우끼시마마루》의 조선인승선과 출항은 철저히 일본정부의 허가와 지시밑에 일본군부당국의 모략에 의하여 이루어진것이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국내에서는 커다란 혼란들이 일어났다. 그렇지만 일본군에 속한 수송선이 정부와 군부의 승인없이 마음대로 출항할수 없었으며 더우기 군용선박에 짐승만도 못하게 여기던 조선사람들을 태운다는것은 상상조차 할수 없는 일이였다.
《우끼시마마루》는 처음부터 항로를 부산항으로가 아니라 계획된 폭침장소인 마이즈루항으로 항로를 정하고 떠났다.
후날 《우끼시마마루》의 이전 승조원의 증언에 의하면 오미나또항을 떠날 당시 이 배에는 얼마 되지 않는 연료만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애당초 《우끼시마마루》가 부산항까지 갈 계획이 아니였음을 명백히 보여주고있다.
배의 폭발직전에 배에 탔던 일본놈들이 황급히 뽀트를 타고 달아난 사실 역시 배의 폭침이 이미 치밀하게 계획되여있었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로 되는것이다.
《우끼시마마루》가 기뢰에 의하여 침몰되였다고 한 일본반동들의 변명도 거짓이였다. 당시 항만으로는 1 000t급배들이 수백여척이나 수시로 드나들고있었다. 그런데 유독 조선사람들이 탄 배만이 기뢰에 걸렸다는것은 뻔뻔스럽고 철면피하기 그지없는 거짓말에 불과한것이였다.
더우기 배가 침몰된 8월 24일은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는 항로의 기뢰해제가 전부 끝난 뒤였으며 《우끼시마마루》는 항경비대신호소로부터 《소해완료》라는 신호를 받은 후에야 입항하였던것이다.
또한 목격자들과 생존자들은 기뢰가 폭발할 때 일어나는 커다란 물기둥을 전혀 보지도 못했다는것을 명백히 증언하였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기뢰는 한번밖에 폭발하지 않는데 배의 폭발시에는 3~4차례의 련속적인 폭발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모든 사실은 《우끼시마마루》가 기뢰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로 폭발한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꾸며진 음모에 따라 배안에 장치된 폭발물에 의하여 폭침되였음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일제살인귀들의 만행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놈들은 사건현장으로부터 300m밖에 안되는 항에 해군함정들이 여러척이나 정박해있었으나 배가 폭침될 때 배우에서 튕겨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조하기 위한 아무런 대책도 취하지 않았으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800여명의 조선사람들을 《보호》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마이즈루항의 일본해군숙소에 가두어넣고 이튿날 새벽에 숙소안에 설치된 대형보이라 증기탕크를 폭파시켜 그들모두에게 중상을 입히는 치떨리는 만행을 또다시 감행하였다.
일제살인귀들은 살아남은 몇명 안되는 조선사람들마저 모조리 학살함으로써 저들의 비인간적인 살륙만행의 비밀을 영원히 묻어버리려고 획책하였던것이다.
일제는 특대형살인만행인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직후 당시 재일조선인련맹중앙위원회와 피해당사자들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침몰된 배를 인양하지도 않은채 기뢰에 의한것이라고 생억지를 부리면서 사건조사를 가로막고 진상을 덮어버리려고 교활하게 책동하였다.
폭침사건과 같은날에 일어난 사건인 180명의 사망자를 낸 철도사고에 대해서는 굉장히 떠들면서도 그에 대비도 안되는 5 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특대형사건인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며 《우끼시마마루》에 의한 조선인귀환사업을 직접 조직한 오미나또해군경비부의 참모라는자는 배의 침몰경위에 대하여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책임이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면서 기자들을 뿌리치는 횡포한짓을 감행하였다.
사실들이 보여주는바와 같이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은 우발적인 사고가 아니라 일제살인귀들의 의도적인 조작에 의한 집단학살사건으로서 놈들의 조선민족말살정책이 얼마나 집요하고 야만적이였는가 하는것을 폭로하는 단적인 실례에 불과하다.
우리 인민은 일제가 감행한 《우끼시마마루》폭침사건과 같은 치떨리는 조선민족말살행위들을 절대로 잊지 않을것이며 지난날 살인귀들에 의해 억울하게 숨진 수백만 조선사람들의 하늘땅에 사무친 피맺힌 원한을 천백배로 기어이 풀고야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