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구려의 수도방어성-황룡산성

 2026.9.8.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에는 대성산성과 같은 훌륭한 산성이 많았습니다. 자모산성, 황룡산성과 오녀산성을 비롯하여 크고작은 산성이 고구려땅을 조밀하게 뒤덮고있었습니다.》

고구려의 강대성과 높은 문화발전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성유적들가운데는 황룡산성도 있다.

황룡산성은 남포시 룡강군 옥도리 오석산에 있다.

황룡산성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있었던 봉건소국 황룡국의 명칭으로부터 유래되였다고 한다.

성이 있는 산의 명칭으로부터 오석산성이라고도 한다.

황룡산성은 오석산(566m)의 험한 산세를 리용하여 쌓은 석성으로서 둘레의 길이는 6 620m이며 평면생김새는 타원형에 가깝다.

오석산은 남포일대에서 가장 높고 험한 산이며 서쪽과 북쪽으로는 온천벌과 증산벌이 내려다보이며 멀리에는 조선서해가 펼쳐져있다. 동쪽으로는 험한 산줄기들이 늘어져있고 남쪽에는 우산의 국사봉과 남포시가 바라보인다.

오석산은 이처럼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고 멀리에서 움직이는 적을 한눈에 살필수 있으며 조선서해지구와 평양을 련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놓여있다.

황룡산성은 오석산의 주봉을 중심으로 동쪽은 높고 서쪽은 그보다 좀 낮은 8개의 봉우리와 릉선을 련결하여 쌓은 고로봉식산성이다.

성벽은 유리한 지형조건을 리용하여 산릉선을 따라가면서 쌓았다.

황룡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외면축조방법으로 쌓았고 골짜기를 넘어서는 곳과 평지를 통과하는 부문에서만은 량면축조방법으로 쌓았다.

오석봉처럼 험한 봉우리와 절벽이 많은 곳에서는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삼았다. 그리고 성벽의 대부분은 릉선을 따라 잘 다듬은 성돌을 바깥부분에만 쌓았다. 산릉선을 따라서 쌓은 성벽의 높이는 대체로 4~5m이다.

옥도벌에 잇닿은 남쪽골짜기와 지형이 비교적 낮은 북쪽기슭에는 특별한 주의를 돌려 기초부분에 큰 돌을 놓고 그 우에 4각추모양의 성돌을 량면쌓기방법으로 차곡차곡 올려쌓았다. 이곳 성벽은 굽도리를 조성하고 밑으로부터 우로 올라가면서 성돌을 조금씩 뒤로 물려 계단식으로 쌓는 방법과 전반적으로 경사를 지어쌓는 방법을 배합하였다. 평지부분에서 성벽의 높이는 대체로 10~11m, 밑변의 너비는 6~8m, 웃너비는 3.5~4.5m정도이다.

황룡산성 성벽에는 성문, 옹성, 치, 성가퀴, 장대, 수구문 등이 있다.

성문은 동, 서, 남, 북 네면에 지형상 다니기에는 좋고 방어하기에도 유리한 곳에 냈다. 지금은 문터만 남았는데 남문과 북문, 서문에는 무지개문길을 내고 동문에는 우에 이마돌을 올려놓은 미식문길을 냈다. 옛날에는 이 네 대문우에 모두 문루가 있었다고 한다.

황룡산성의 정문인 남문우에는 《불위루》라고 웅장한 2층문루가 있었으나 지금은 주추돌만이 남아있다. 남문앞에는 반원형의 옹성이 있다.

남문부근에는 오석산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성밖으로 빼기 위한 수구문이 있는데 적들이 기여들수 없게 한 기둥(은주)을 설치하였던 자리가 남아있었다.

황룡산성에는 물원천이 풍부하다. 옛 기록에는 10개의 샘물과 3개의 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도 여덟군데에서 큰 샘물이 사시장철 마를줄 모르고 솟아나오고있다.

산성에는 동, 서, 남, 북 봉우리마다에 장대터가 있다. 이것은 전시에는 전투지휘처로, 평상시에는 감시처로 리용하던 곳이다.

성의 북장대인 오석봉에는 봉수터가 있다. 황룡산성은 수도 평양의 서쪽 위성으로서 대동강하구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한 사명을 수행하였다.

황룡산성은 고려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성으로 리용되였으며 고려시기인 919년에 보수되여 조선봉건왕조시기에는 여기에 룡강창, 함종창, 삼화창 등 식량창고를 두어 평양서쪽의 보루로 계속 리용되였다.

오늘 황룡산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국보유적 제37호로 훌륭히 보호관리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