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의 천리길,
돌이켜보면 우리
가야 할 천리중 500리이상은 무인지경이나 다름없었고 길량옆의 수림들에서는 대낮에도 맹수들이 어슬렁거리는 험산준령이였다. 오가산을 비롯하여 하루종일 넘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령들도 있었다.
어른들도 선뜻 나서기 주저하는 그런 위험천만한 길을 10대의 나이에 그것도 단신으로 용약 걸으시였으니 우리
주체14(1925)년 1월 하순 눈내리는 어느날 평안북도 녕변군(현재 구
그이의 모습을 뵈옵는 순간 객주집주인들은 기쁨을 금치 못해하며 매우 반갑게 그 학생을 집안으로 맞아들이였다.
바로 2년전에
당시 객주집이라고 하면 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로상에서 하루밤정도 쉬고가는 곳으로서 집주인들은 사람들에 대해 별로 기억하지 못하는것이 상례였다. 구장객주집의 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두해전 12살 어리신 나이에 배움의 천리길을 걸으시면서 단 하루밤만을 쉬고간 잊지 못할 나어린 소년의 남다른 모습을 마음속깊이 새기고있었다.
만난 첫 순간부터 집주인들과 길손들에게 례절바르게 인사를 하시고 방안에 들어서시는 나어린 소년의 겸허한 품성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모았다. 비록 나이는 어려보이지만 례절이 매우 밝고 영채가 도는 나어린 소년의 존안을 우러르며 객주집로인은 그이께 지금 몇살이며 이 추운 날씨에 혼자서 어디로 가는가고 저으기 감동된 어조로 물었다.
중국 팔도구에서 공부하다가 조선을 더 잘 알기 위해 조국으로 나간다는 소년의 대답을 듣는 순간 객주집주인은 자기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숭고한 세계앞에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허나 더욱더 놀라운 일들을 다음날 아침에 목격할줄은 그때까지 그들은 미처 몰랐다.
이튿날 이른새벽 객주집안주인은 여느때처럼 집마당을 쓸려고 밖으로 나갔다.
순간 그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제 객주집에서 숙박한 나어린 소년이 새벽일찍 일어나시여 집마당을 깨끗이 쓸어놓으시였던것이다.
이것은 이때까지 객주집이 생긴이래 있어보지 못한 일이였다. 길손들은 보통 객주집에 들면 숙박비를 내는것으로 하여 의례히 잠자리와 식사를 대접받으며 로독을 푸는것을 응당한것으로 여기여왔고 집주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여왔던것이다.
길손이 아니라 집주인이 되신 심정에서 알뜰히 거둔 마당을 둘러보며 녀인이 혀를 끌끌 차고있는데 이번에는 나어린 소년이 마당을 쓸면서 모아두었던 검부레기와 소가 먹다남긴 여물찌끼를 집뒤에 있는 살구나무에 거름으로 가져다 묻어주자고 하시는것이였다. 계속하시여 만경대에 계시는 우리 할아버님께서는 늘 이런 거름을 복숭아나무에 묻어주시군 한다고, 그러면 열매가 많이 달릴뿐 아니라 맛도 좋아지고 벌레도 끼지 않는다고 하시는
어쩌면 어린 나이에 저렇듯 품성이 소탈하며 출중하고 박식하실가.
안주인의 감탄은 비단 여기에만 끝나지 않았다.
그 나어린 소년이 또다시 길가에서 소잔등우에 방아감을 싣고가다가 짐짝이 찌그러져 무진 애를 쓰고있는 녀인의 모습을 띄여보시고 거기로 달려가시여 그의 일손을 세심히 도와주고계시는것이였다.
수많은 길손들을 객주집에서 맞고보낸 객주집내외로서는 처음 보는 나어린 소년의 비범한 천품과 인품이였다.
잊지못할 나어린 소년이 떠나가신 그날 객주집주인들은 그이에 대해 《큰일을 할 어른은 어려서부터 다르다더니 뉘집 자제분인지 이다음 어른이 되면 큰일을 하겠다.》라고 칭찬하며 집에서 단 하루밤만을 쉬고가신 길손에 대해 두고두고 이야기해왔다.
이렇듯 잊지 못해하던 길손이 2년만에 다시 오시였으니 집주인들의 반가움과 기쁨은 실로 컸던것이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객주집주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집주인들은 먼 후날에야 자기들의 집에 들리셨던 나어린 소년이 바로 강도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해방시켜주신
당시 구장객주집에는 낡은 객부책(숙박등록대장)이 있었는데 그 책에 《김성주》라는 어린시절의
객주집주인들은 그 객부책에 새겨져있는
배움의 천리길과 광복의 천리길을 걸으신
사람이 자신의 일생을 다 바친다 해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뚜렷한 추억을 남긴다는것은 실로 힘든 일이다.
하지만
조국과 인민을 위해 그렇듯
정녕 세월이 흘러도 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을 불러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