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개성의 력사유적-만월대

 2023.10.2.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력사유적과 유물들은 후대들에게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을 보여줄뿐아니라 자기 나라와 민족의 력사를 잘 알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귀중한 유산입니다.》 (김정일전집》 제2권 76페지)

조선민족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지고있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민족이다. 조선민족의 오랜 력사와 그 과정에 창조된 우수한 문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민족으로서의 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할수 있게 하는 중요한 조건으로 되고있다.

개성은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도읍지로서 오랜 력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개성은 근 500년간 고려의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세계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도시이다.

2013년 6월 23일 캄보쟈의 프놈 뻰에서 진행된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유산위원회 제37차회의에서는 우리 나라 개성시의 일부 력사유적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할데 대한 결정이 채택되였다.

개성시의 력사유적들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록된것은 그 력사문화적가치에 대한 국제적인 공인으로 되며 이로 하여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가 세계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개성시의 력사유적들가운데는 만월대도 있다.

개성시 송악동에 자리잡고있는 만월대는 우리 나라 력사상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의 왕궁터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81(1992)년 5월 5일 몸소 만월대에 찾아오시여 만월대는 고려태조인 왕건이 두번째로 지은 왕궁자리인데 왕궁자리를 잘 잡았다고 하시면서 왕건이 민족사발전에 긍정적역할을 한 인물인것만큼 고려왕궁을 일부 복구하고 력사박물관으로 쓰도록 하는것이 좋겠다고 교시하시였다.

만월대라는 이름은 원래 궁궐안에 음력 정월 보름달을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놓았던 《망월대》에서 유래된것이라고 전해지고있다. 이 망월대의 이름이 오래 전해오는 과정에 만월대로 변하였다.

고려왕궁터인 만월대는 125만m2의 방대한 부지를 차지하고있다. 왕궁은 궁성과 그 남쪽에 있던 황성으로 나뉘여지며 궁성의 면적은 39만m2이다.

만월대의 특징은 축대를 높이 쌓고 그우에 정전인 회경전을 비롯한 여러개의 크고작은 건물들을 배치하여 하나의 건축군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매우 웅장하게 돋보이게 한것이다.

만월대에는 회경전이 있는 중심건축군을 중심으로 그 남쪽은 입구구획, 서쪽에는 내전과 침전들이, 동쪽에는 동궁이, 동남쪽에는 못이 있다.

궁성의 정문은 남쪽에 있는 승평문이였고 서쪽에 서화문, 동쪽에 동화문, 북쪽에 현무문 등과 그밖에 작은 문들이 있었다. 동화문은 궁성과 잇닿아있는 동궁 즉 왕태자가 살던 곳으로도 통하였다. 광화문을 지나 승평문안에 들어서면 좌우에 동락정이라는 루정이 있었고 승평문과 신봉문사이에는 구정이라고 불리우던 넓은 마당이 있었다. 신봉문은 2층으로 된 웅장하고 화려한 문이였는데 왕을 비롯한 관리들이 구정에서 진행하는 격구, 팔관회, 연등회 등을 신봉문 문루우에서 보았으며 여기에서 군사도 사열하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지금도 기단과 주추돌이 남아있다. 신봉문터에서 북으로 가면 창합문터가 있는데 여기를 지나면 마당앞에 4개의 웅장한 돌계단을 갖춘 높은 축대가 있다. 이것이 회경전을 비롯한 만월대의 중심건축군이 자리잡은 축대이다.

회경전은 규모가 웅대할뿐 아니라 란간에 붉은 옻칠을 하고 구리로 만든 꽃으로 장식하였으므로 문양과 채색이 웅장화려하여 다른 전각보다 뛰여났다.

33단의 돌계단은 경사가 급하여 높이 솟아보이는데 그우에 화려한 단청을 한 회경전 전문이 있었을 때에는 참으로 으리으리하였을것이다.

회경전 동북쪽으로는 약간 치우쳐 길게 건축군이 련결되여있었다. 회경전뒤로 장화전, 원덕전(또는 문덕전)등이 있었다.

만월대의 왕궁은 919년에 건설된 후 네차례에 걸쳐 불에 탔다. 즉 1010년 거란의 제2차침입때, 1128년 리자겸의 반란때, 1232년 몽골침략때에 불탔다. 그후 1361년 홍두적의 침입때 불에 탄 후로는 다시 복구하지 못하였다.

8.15해방후 이 일대에 둥지를 틀고있던 미제침략자들은 침략전쟁준비를 위한 군사시설증강에 미쳐날뛰면서 만월대에 제놈들의 병실을 짓겠다고 불도젤로 밀어버리는통에 회경전뒤에 있던 셋째 궁전터와 넷째 궁전터의 주추돌들은 거의나 없어졌다. 이밖에 서쪽 황성구역의 집터들도 못쓰게 만들었으며 지난 조국해방전쟁때에는 무차별적폭격으로 회경전과 그 서쪽 림천각의 축대를 파괴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의 포성이 멎은지 불과 한주일도 안되던 주체42(1953)년 8월 2일 남대문과 만월대를 비롯한 고적들이 적들의 폭격으로 파괴되였다는 내각조사성원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후대들에게 물려줄 귀중한 고적들인것만큼 원상대로 복구해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미제에 의하여 몹시 파괴되였던 만월대는 주체42(1953)년 정전이 된 그해에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에 의하여 인민군군인들의 로력적투쟁에 의하여 복구되였다.

만월대는 고려시기 왕궁터였지만 고려시기의 건축예술과 인민들의 창조적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 우리 당의 민족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오늘 민족의 재부로 전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