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나라에는
《리승기박사는 주체과학을 발전시킬데 대한 우리 당의 로선을 우리 나라의 현실에 구현한 과학자이며 그의 연구성과에 기초하여 창설된 비날론공업은 주체공업의 훌륭한 본보기입니다.》 (
우리 인민들은 누구나 리승기선생이라면 비날론을 연구해낸 사람이라고 말하며 그를 잊지 않고있다.
리승기선생은 1905년 10월 1일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하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외국에 가서 고학을 하여 주체20(1931)년에 공과대학을 졸업하였다. 대학졸업후 그는 주체28(1939)년 7월 12일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폴리비닐알콜에서 새로운 합성섬유인 비날론을 발명하는 특출한 연구성과를 내놓았다.
그는 주체28(1939)년 10월 4일 오사까의 회관에서 비날론연구론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세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연구론문은 도이췰란드와 프랑스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들의 도서관에도 보관되여있다.
그후 비날론공업화를 위한 연구사업을 시작하였으나 대륙침략에 미쳐날뛴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에게 군수생산과 관련된 연구사업을 하도록 강박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가 순응하지 않는다 하여 연구비를 잘라버렸고 나중에는 그를 체포구금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일제의 민족차별정책과 박해에도 굴함없이 민족적존엄을 지켜온 그는 일제의 헌병대감방에서 감옥생활을 하다가 거기서 8.15를 맞이하였다.
그다음 주체34(1945)년 해방이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에 들어와
주체39(1950)년 7월부터 함경남도 흥남시(당시)의 화학공장 기사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조국해방전쟁의 가장 준엄한 시기에도 당과 수령의 따뜻한 품속에서 평안북도 청수화학공장에서 비날론연구사업을 계속하였으며 주체적인 비날론공업창설을 위한 과학연구사업을 진행하였다.
인민군군인건설자들과 우리 인민들의 영웅적투쟁에 의하여 매우 짧은 기간에 비날론공장건설이 우리의 설계, 우리의 설비, 우리의 힘으로 완공되였다.
그리하여 주체50(1961)년 5월 6일 비날론공장조업식이
그리고 비날론공장건설이 한창인 주체49(1960)년 10월 리승기선생이 갑자기 병환으로 누워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몸소 친필과 함께 산삼 두뿌리를 선물로 보내주시였다.
비날론이라는 이름도
원래 리승기선생은 폴리비닐알콜계섬유를 간략자로 《비알론》으로 달았었다.
그리고 공장명칭도 우리 인민군군인들이 건설한 공장이라고 하여 몸소 《2.8비날론공장》이라고 명명해주시였다.
그후 1980년대에 와서 《2.8비날론련합기업소》라고 부르게 되였다.
그의 연구사업에 기초하여 우리 나라에 매장량이 풍부한 석회석과 무연탄을 원료로 하는 주체적이며 대규모적인 비날론공업이 창설되였다.
비날론생산이 공업화된 후 그는 계속하여 비날론의 질을 높이고 품종을 늘이기 위한 연구사업과 모비론(폴리염화비닐계섬유)을 공업화하기 위한 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함흥지구에 함흥모비론섬유공장도 새롭게 일떠서게 되였다.
그는 화학공업성 화학공업연구소 연구사를 거쳐 주체50(1961)년 2월부터 생애의 마지막까지 과학원 함흥분원 원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수많은 박사, 교수들을 양성하였으며 저술활동도 많이 하였다.
그의 대표적저작은 《비날론》과 《비날론론문지》이다.
단행본 《비날론》은 다른 나라에서도 번역출판되였다.
그는 원사(1952년), 교수(1961년), 박사(1959년)이며 다른 나라의 과학원 명예원사, 명예교수칭호도 받았다. 그는 주체46(1957)년 8월 제2기부터 제9기에 이르기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거되여 사업하였다.
나라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데서 세운 특출한 공로로 하여 로력영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