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중을 의식화하는데서 연극예술이 노는 비상한 견인력과 효과성에 큰 기대를 걸고있었다. 당시로서는 연극만큼 대중의 심장을 잡아흔드는 예술이 별로 없었다.》 (
불후의 고전적명작 혁명연극 《피바다》는 항일혁명투쟁시기 우리 인민을 혁명적으로 각성시켜 일제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 이바지한 혁명적극문학예술의 대표적작품이다.
언제인가 유격대원들이 싸움이 있은 다음에 열린 오락회에서 《간도토벌가》를 부른적이 있는데 그때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남녀로소 할것없이 모두가 눈물을 뿌리며 일제를 저주하고 항일을 결의하였다. 《간도토벌가》 하나만으로도 울음바다를 펼쳐놓게 된 오락회장의 돌발적인 정경은
동강회의가 끝난 다음 리동백은 어느 마을에선가 신간문예잡지를 가지고 와서
자기가 잘 아는 사회운동자의 안해도 다른 놈팽이와 정분이 깊어져서 아이를 버리고 달아난 일이 있는데 거기에는 생활의 진실의 일단이 반영되여있다고 하면서 쓸쓸해하는 리동백에게
소설에 그려진 이야기나 리동백이 아는 사회운동자의 안해의 이야기와 같은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현상을 어떻게 생활의 진실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우리
이것이 바로 우리
진실을 반영해야만 문학은 독자대중을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에로 인도할수 있는것이다. 진실의 반영으로써 인민대중을 아름답고 숭고한 세계에로 인도하는것이 바로 문학과 예술의 참사명이다.
한편의 소설에 대한 독후감으로부터 시작된 담화가 우수한 녀성투사들과 녀성활동가들, 덕행과 정절에서 모범으로 내세울수 있는 렬녀들에 대한 이야기로 계속되는 과정에 리동백이 이런 서푼짜리 작품을 써내는 사람들에게 자극을 좀 주어야겠다고 하면서
리동백의 그 청을 받은 다음부터
1936년 당시 만강은 80여호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산재부락으로서 무송지방에 흔치 않은 조선인부락의 하나였다.
마을사람들의 뜨거운 환대속에 허락여촌장네 집 웃방에 지휘부를 정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는
자진하여 무대감독을 맡아나선 리동백에게는 배우선발에서부터 난관이 제기되였다. 왜놈 《토벌대장》역을 누구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론의를 거듭하다가 성미가 콸콸한 리동학중대장에게 억지다짐으로 떠맡기였다. 을남의 어머니역은 장철구에게 갔다가 김확실에게로 넘어갔고 갑순의 역은 김혜순에게 분담되였다. 《토벌대장》역 못지 않게 리동백을 딱하게 한것은 갑순의 동생 을남이의 역선발이였다. 10살안팎의 나어린 소년의 역에 합당한 체소한 인물이 부대에 없어서 만강부락의 아이를 데려다 시키였다.
《대통령감》은 연출작업에서도 많은 고충을 겪었다. 그가 연기형상을 지도하면서 제일 걱정한것은 을남이의 역을 맡은 만강의 어린이였는데 놀랍게도 이 산골내기 어린이가 연출가의 의도를 제일 민감하게 포착하는것이였다.
그대신 어른들의 연기가 잘되지 않아서 리동백의 애를 말리였다. 거의 모든 연기자들이 무대에만 나서면 몸가짐을 어떻게 할지 몰라서 쩔쩔매였다.
눈썰미가 빠르고 다정다감한 김혜순조차도 정작 연극을 한다고 하니까 눈살이 꼿꼿해지고 말도 별스럽게 하였다. 울어야 할 대목에 가서는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군 하였는데 리동백이 달래기도 하고 추어주기도 하고 화까지 내면서 별수를 다 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가 자기의 기량을 마음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지적을 받군 하는것을 보신
김혜순의 연기는 그 순간부터 일변되였다.
총과 배낭밖에 메고 온것이 없는 유격대원들이 순식간에 가설무대를 만들어세우고 생전 본적이 없는 연극을 펼쳐놓게 되자 만강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하였다.
그들은 무대우에 자기들이 겪어온 생활과 꼭같은 생활이 펼쳐지자 가슴을 움켜쥐고 연극의 세계에 끌려갔고 나중에는 갑순이와 함께 울고 어머니와 함께 부르짖었다. 한 로인은 자기가 지금 연극을 본다는것도 잊고 무대에 뛰여올라가 을남이를 쏘아죽인 일본군 《토벌대장》역을 맡은 리동학의 이마를 장죽으로 후려치기까지 하였다.
연극 《피바다》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린 그날 만강사람들은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등잔불밑에서 연극을 본 소감을 나누었다. 어떤 집들에서는 여럿이 모여서 웃고 떠들며 밤을 보내였다.
만강에서의 연극공연은 두메산골 까막눈이던 젊은이들과 늙은이들을 계몽하고 교양하여 항일혁명투쟁의 적극적인 참가자로, 후원투사로 개변시켰다. 그때 수많은 마을청년들이 무대에 뛰여올라와 참군을 열렬히 청원하였다. 이렇게 만강은 수많은 참군자를 배출한 고장의 하나로 되였으며 조선인민혁명군의 믿음직한 후방보급기지의 하나로 되였다.
이 연극이 만강사람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는가 하는것은 20여년이 지나서 혁명전적지답사단이 만강을 방문하였을 때에도 그곳 사람들이 공연을 한 장소만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상세한 줄거리, 지어 일부 대사까지 생생히 기억하고있더라는 사실만으로도 가히 짐작할수 있다.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의 견인력과 위력에 대하여 한 항일혁명 투사는 이렇게 회상하였다.
《간고한 항일혁명투쟁의 그 나날! 나라없던 그 세월에는 눈물과 한숨만이 가득찼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의 노래를 부르며 살길을 찾아 남의 나라로 쫓겨가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눈물속에 찾아간 땅에서도 나라없는 백성이라고 불에 타죽고 칼에 찔리우지 않으면 안되는 천덕꾸러기들이였습니다. 그래서 공포심이 얼굴에서 떠날줄 몰랐고 군복입은 사람들을 보면 모두 살인자로만 보였던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혁명군이 인민을 위한 군대이고 나라를 찾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라는것을 설명으로써 알려준다는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언제나 인민을 위해 그들의 심정도 남먼저 들여다보고 계시는
조선인민을 닥치는데로 학살하고 략탈하는 일제의 귀축같은 만행, 설한풍 스산한 원한의 피바다에서 우리 인민이 굴함없이 싸울 때만이 이길수 있다는것을 생활그대로 형상한 혁명연극은 인민들의 심장을 울려주었습니다. 인민들은 주먹을 틀어쥐고 간악한 일제를 절규했고 저마다 총을 잡고 싸우겠다고 나섰습니다. 이처럼 혁명연극은 사람들의 심장을 울려주는 진심의 목소리였습니다.》
지금은 고유한 우리 말로 《피바다》라고 하지만 만강에서 창작공연될 당시 이 명작의 제목은 《혈해》였다. 그후 연극공연에 직접 참가했던 사람들과 그것을 본 사람들에 의하여 《혈해가》 혹은 《혈해지창》의 제목으로 여러곳에서 공연활동이 진행되였다. 그러는 과정에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이름도 조금씩 달라지고 어떤 고장에서는 자기들에게 더 가까운 생활소재를 바꿔넣기도 하였다.
만강에서 진행된 《피바다》공연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여운을 남겼는가는 이것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이와 같이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는 자주성을 옹호하기 위한 인민대중의 혁명투쟁의 본질을 심오한 예술적형상으로 밝히고 당시 항일무장투쟁발전에서 절박하게 나서고있던 중요한 문제들을 생동한 예술적화폭속에 빛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항일무장투쟁의 승리적발전에 불멸의 공헌을 하였다.
불후의 고전적명작 혁명연극 《피바다》가 창작공연된 때로부터 세월은 멀리로 흘러왔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으며 적대세력의 책동은 오늘도 계속되고있다.
이 세상에 제국주의와 착취제도가 남아있는 한 불후의 고전적명작 《피바다》의 생명력은 영원불멸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