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건국시조왕의 무덤인 동명왕릉문제를 정확히 해명해주신
력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하고있는 동명왕릉은 세월의 풍랑속에 형체조차 찾아볼수 없었던 지난날의 초라한 모습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오늘은 강성대국 고구려국가의 건국시조릉답게 웅장하고 훌륭하게 개건되여 자기의 웅자를 자랑할뿐아니라 세계의 우수한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여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되고있다.
동명왕릉이 오늘과 같이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여 조선민족의 지혜와 슬기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으로 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고구려국가의 력사를 바로잡는데서 고구려유산발굴고증과 복구사업이 가지는 중요성을 통찰하시고 여기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로고에 로고를 바쳐오신
해방후에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릉이 동명왕의 무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론쟁이 많이 벌어졌다. 당시 사대주의에 물젖은자들은 평양이 고구려의 첫 수도가 아니였기때문에 동명왕의 무덤이 평양에 있을수 없다는 얼빠진 소리를 줴치였는가 하면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중국의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길 때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지 않았다느니, 동명왕의 무덤이 집안에 있다느니 하면서 룡산리에 있는 릉을 동명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얼토당토한 주장을 내대였다.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력사유적입니다.》 (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다른 고장으로 옮겨갈 때 조상의 유골을 가지고가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부모가 살아있을 때나 세상을 하직하였을 때나 변함없이 잘 모시는것이 조선민족의 고유한 전통적인 풍습인것과 관련되여있다.
조선사람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유골을 언제나 자기가 살고있는 마을 또는 지역의 가까운 곳에 묻고 부모의 생일날이거나 추석을 비롯한 민속명절날들에 부모의 령전에 제를 지내군 하였다. 그렇게 하는것이 자기를 낳아 키운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것으로 인정하였다.
바로 자기의 조상을 잘 모시는 이러한 풍습은 국가활동에서도 표현되였다.
고조선국가에서는 시조군주인 단군릉을 수도 평양지방에, 고려국가에서는 시조군주인 왕권릉을 수도인 개경에 세워놓고 여러 계기들에 시조군주들에 대한 제를 전통적으로 지내였다.
고구려의 동명왕릉에 관한 문제는 고구려의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고구려는 천년이라는 장구한 력사를 가진 국가였다. 고구려가 천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강대국으로 존엄을 떨칠수 있은것은 고구려국가를 건립한 동명왕과 주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 고주몽은 노예제가 사회발전을 억제하고있던 고구려건국이전시기 가장 선참으로 봉건적발전을 지향한 세력의 주동인물이였으며 무예를 익히고 군사를 숭상하는 정신으로 성장하여왔다.
고구려국가가 창건된지 10년만에 벌써 옛 구려의 령역을 훨씬 벗어나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는 전쟁을 힘있게 벌려 동서 1 500여리의 령역을 가진 국가로 강화된것은 바로 고구려국가를 세운 고주몽이 얼마나 군사를 내세우고 장려하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주고있으며 그 이후 동서 6 000리, 남북 4 000리의 광활한 령토를 가진 동방의 강대국으로 되게 된 력사적사실은 고구려국가의 강성 그 근저에 상무정신이 놓여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건국시조인 고주몽이 죽은 후 그가 동방을 밝힌 공적을 세운 성스러운 대왕이였다는 의미에서 동명성왕으로 시호를 붙이였으며 그를 적극 숭배하였다.
고구려의 동명왕릉은 바로 그처럼 강대한 고구려를 일떠세운 건국자의 무덤인것으로 하여 고구려의 강대성의 력사해명의 첫 출발점으로 되는것이다.
봉건사회에서 국가가 수도를 옮긴다는것은 원래의 통치자가 거처하게 되는 통치중심지를 옮긴다는것이며 이것은 곧 원래의 수도가 지방으로 되고 옮겨지는 수도의 지역이 중앙으로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고구려국가의 통치자들이 수도를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기면서 통치자들이 신격화하는 대상으로 되여있는 건국시조인 주몽의 유골을 지방으로 된 집안에 그대로 두고 온다는것은 도대체 상상할수 없는것이였다.
고구려의 통치자들은 바로 건국시조의 릉을 평양으로 옮겨와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것을 통하여 상무정신이 나라통치의 정신적기초로 계속되게 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이와 함께 강대국으로 더욱더 부상하는 자기의 면모를 정신적으로 안받침하려고 하였던것이다.
결국 룡산리의 릉은 단순히 어느 귀족의 무덤이거나 혹은 어느 장수의 무덤인것이 아니라 고구려국가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무덤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강도 일제가 릉을 파괴하고 릉안의 유물들을 전부 도적질해갔으므로 릉에 대한 유물발굴사업이 어려웠지만
그리하여 오래동안 미해명으로 남아있던 동명왕릉고증문제는 비로소 빛나게 해결되게 되였다.
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