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어버이수령님과 고구려의 력사 (3)

 2016.12.10.

고구려의 건국시조왕의 무덤인 동명왕릉문제를 정확히 해명해주신
어버이수령님의 불멸의 애국업적

력포구역 룡산리에 위치하고있는 동명왕릉은 세월의 풍랑속에 형체조차 찾아볼수 없었던 지난날의 초라한 모습을 완전히 털어버리고 오늘은 강성대국 고구려국가의 건국시조릉답게 웅장하고 훌륭하게 개건되여 자기의 웅자를 자랑할뿐아니라 세계의 우수한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여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되고있다.

동명왕릉이 오늘과 같이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여 조선민족의 지혜와 슬기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으로 될수 있은것은 전적으로 고구려국가의 력사를 바로잡는데서 고구려유산발굴고증과 복구사업이 가지는 중요성을 통찰하시고 여기에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로고에 로고를 바쳐오신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민족애의 결과이다.

해방후에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릉이 동명왕의 무덤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론쟁이 많이 벌어졌다. 당시 사대주의에 물젖은자들은 평양이 고구려의 첫 수도가 아니였기때문에 동명왕의 무덤이 평양에 있을수 없다는 얼빠진 소리를 줴치였는가 하면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중국의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길 때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지 않았다느니, 동명왕의 무덤이 집안에 있다느니 하면서 룡산리에 있는 릉을 동명왕의 무덤이 아니라고 얼토당토한 주장을 내대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적이며 과학적인 안목과 력사적론리로 사대주의자들의 주장이 잘못된것이라는것을 하나하나 밝혀주시여 이 릉이 고구려국가의 건국시조의 릉이라는것을 정확하게 해명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명왕릉은 고구려시조왕의 무덤으로서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력사유적입니다.》 (김일성전집》 제88권 79페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78년(1989) 4월 2일과 14일에 동명왕릉과 동명왕릉건설총계획사판, 도면을 보시면서 일군들에게 자신께서는 해방직후부터 동명왕릉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려왔다고,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다른 고장으로 이사갈 때 다른것은 못가져가도 조상의 유골만은 가지고가는 풍습이 있었다고, 고구려가 당시 매우 강대한 나라였는데 고구려사람들이 수도를 옮기면서 시조왕의 무덤을 옮겨오지 않았을리 없다고, 때문에 룡산리에 있는 릉은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무덤이 옳을것이라고 생각하고 력사학자들에게 그 무덤을 발굴해볼데 대한 과업을 주었는데 발굴을 통하여 그 릉이 동명왕의 무덤이라는것이 과학적으로 확증되였다고 교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은 민족허무주의자들과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오인렬거되여 오던 력포구역 룡산리의 동명왕릉문제를 주체적립장에서 가장 과학적으로 해명하여 바로잡을수 있게 한 강령적인 지침이였다.

예로부터 조선사람들은 다른 고장으로 옮겨갈 때 조상의 유골을 가지고가는 풍습이 있었다. 그것은 부모가 살아있을 때나 세상을 하직하였을 때나 변함없이 잘 모시는것이 조선민족의 고유한 전통적인 풍습인것과 관련되여있다.

조선사람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 그 유골을 언제나 자기가 살고있는 마을 또는 지역의 가까운 곳에 묻고 부모의 생일날이거나 추석을 비롯한 민속명절날들에 부모의 령전에 제를 지내군 하였다. 그렇게 하는것이 자기를 낳아 키운 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는것으로 인정하였다.

바로 자기의 조상을 잘 모시는 이러한 풍습은 국가활동에서도 표현되였다.

고조선국가에서는 시조군주인 단군릉을 수도 평양지방에, 고려국가에서는 시조군주인 왕권릉을 수도인 개경에 세워놓고 여러 계기들에 시조군주들에 대한 제를 전통적으로 지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살던 고장을 떠나 다른 고장으로 옮길 때에는 반드시 자기의 부모의 유골을 가지고가며 국가통치의 중심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는 반드시 시조군주의 유골도 함께 옮겨가는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풍습을 근거로 하여 력포구역 룡산리에 있는 동명왕릉이 고구려건국시조의 왕릉이라는 가장 과학적인 해명을 주시였다.

고구려의 동명왕릉에 관한 문제는 고구려의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선다.

고구려는 천년이라는 장구한 력사를 가진 국가였다. 고구려가 천년이라는 장구한 기간 강대국으로 존엄을 떨칠수 있은것은 고구려국가를 건립한 동명왕과 주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 고주몽은 노예제가 사회발전을 억제하고있던 고구려건국이전시기 가장 선참으로 봉건적발전을 지향한 세력의 주동인물이였으며 무예를 익히고 군사를 숭상하는 정신으로 성장하여왔다.

고구려국가가 창건된지 10년만에 벌써 옛 구려의 령역을 훨씬 벗어나 주변의 소국들을 통합하는 전쟁을 힘있게 벌려 동서 1 500여리의 령역을 가진 국가로 강화된것은 바로 고구려국가를 세운 고주몽이 얼마나 군사를 내세우고 장려하였는가 하는것을 보여주고있으며 그 이후 동서 6 000리, 남북 4 000리의 광활한 령토를 가진 동방의 강대국으로 되게 된 력사적사실은 고구려국가의 강성 그 근저에 상무정신이 놓여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때문에 고구려에서는 건국시조인 고주몽이 죽은 후 그가 동방을 밝힌 공적을 세운 성스러운 대왕이였다는 의미에서 동명성왕으로 시호를 붙이였으며 그를 적극 숭배하였다.

고구려의 동명왕릉은 바로 그처럼 강대한 고구려를 일떠세운 건국자의 무덤인것으로 하여 고구려의 강대성의 력사해명의 첫 출발점으로 되는것이다.

봉건사회에서 국가가 수도를 옮긴다는것은 원래의 통치자가 거처하게 되는 통치중심지를 옮긴다는것이며 이것은 곧 원래의 수도가 지방으로 되고 옮겨지는 수도의 지역이 중앙으로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고구려국가의 통치자들이 수도를 집안으로부터 평양으로 옮기면서 통치자들이 신격화하는 대상으로 되여있는 건국시조인 주몽의 유골을 지방으로 된 집안에 그대로 두고 온다는것은 도대체 상상할수 없는것이였다.

고구려의 통치자들은 바로 건국시조의 릉을 평양으로 옮겨와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것을 통하여 상무정신이 나라통치의 정신적기초로 계속되게 하려고 하였던것이다. 이와 함께 강대국으로 더욱더 부상하는 자기의 면모를 정신적으로 안받침하려고 하였던것이다.

결국 룡산리의 릉은 단순히 어느 귀족의 무덤이거나 혹은 어느 장수의 무덤인것이 아니라 고구려국가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무덤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력포구역 룡산리의 릉이 고구려건국시조 동명왕의 무덤이라는것을 실제적인 유물자료로 확증하도록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주체63(1974)년 1월 23일에 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연구집단에 주체적립장에서 동명왕릉문제를 대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왕릉발굴조사사업을 전면적으로 폭넓게 진행하도록 영예로운 과업을 맡겨주시여 발굴조사를 통하여 이 릉이 고구려의 건국시조 동명왕릉이라는것을 과학적으로 해명하도록 하시였다.

강도 일제가 릉을 파괴하고 릉안의 유물들을 전부 도적질해갔으므로 릉에 대한 유물발굴사업이 어려웠지만 어버이수령님의 귀중한 가르치심을 받아안고 동명왕릉발굴조사사업에 달라붙은 력사학자들과 학생들은 1년간의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발굴조사사업을 통하여 금, 은으로 장식한 여러개의 관못과 왕관을 장식했던 100여개의 금장식품들, 구슬과 머리빗 등 귀중한 유물들을 찾아냈으며 생각지 못했던 벽화까지 찾아내고 릉앞의 큰 절간터를 발굴하면서 《릉사》라는 글을 새긴 기와를 비롯한 많은 유물을 찾아냄으로써 이 묘가 왕릉이 틀림이 없으며 앞의 절간은 왕릉을 위해 지었다는것을 물질적으로 확증하였다.

그리하여 오래동안 미해명으로 남아있던 동명왕릉고증문제는 비로소 빛나게 해결되게 되였다.

실로 어버이수령님의 강령적인 가르치심과 위대한 로고에 의하여 동명왕릉은 우리 민족의 자랑으로 존엄높던 고구려국가건국시조릉으로서의 자기의 이름과 모습을 되찾게 되였으며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 용맹을 전해주는 훌륭한 민족문화유산으로 세상만방에 널리 전해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