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백두의 만병초를 눈앞에 그려보면 먼저 떠오르는 투사가 있다.
사나운 칼바람, 눈보라속에서도 꿋꿋이 피여있는 백두의 만병초와 같이 모진 시련과 역경속에서도 혁명신념과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오로지
《부대에는 녀대원들이 수십명씩이나 있었고 작식대원들도 여럿이였지만 유독 장철구만은 〈어머니〉로 불리웠다.》 (
주체25(1936)년 3월말
그날은 장철구동지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다시 태여난것과 같은 날이였다.
활활 타번지는 불길속에서 그처럼 저주하던 《민생단》문서들이 타버리는 광경을 바라보는 장철구동지의 뇌리에는 지나온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주체19(1930)년 7월 남편을 따라 혁명의 길에 나서던 일, 그로부터 4년후 연길현 왕우구유격구부근의 한 마을에서 부녀회사업을 하던중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억울하게도 《민생단》의 루명을 쓰고 체포되던 일, 무죄로 석방은 되였으나 늘 《민생단》혐의자라는 딱지가 붙어다닌것으로 하여 겪던 마음속괴로움…
《민생단》문서를 태우며 솟구치는 그 불길은 장철구동지에게 있어서 가슴속에 얼어붙어있던 응어리를 순간에 녹여버리고 새로운 삶의 숨결을 안겨주는 재생의 불길이 아닐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장철구동지는 또다시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받아안았다.
(
이날 장철구동지는 북받치는 감사의 정으로 눈굽을 적시며 이렇게 마음속맹세를 다지였다.
이것은
장철구동지는 한생토록 이 맹세를 지키였다.
장철구동지는 사령부작식대원으로서
그는 녀성의 몸으로 사령부의 작식을 위해 늘 남보다 더 큰 짐을 지고다니였고 대원들이 다 자는 깊은 밤에도 다음날의 식사준비를 위해 산나물을 다듬고 망질과 키질을 하면서 밤을 새우군 하였다. 그는 노상 불앞에서 살다싶이 하였다. 그때문에 옷도 남보다 갑절 빨리 해지였다.
언제인가 한번은 밀영에서 오락회가 벌어졌는데 장철구동지가 지명을 받았다.
전우들은 모두 그의 노래를 듣고싶어하는데 장철구동지는 훌쩍 일어나 숲속으로 달아나버리는것이였다.
그 돌발적인 행동은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하였다.
숲속으로 뛰여가는 그를 바라보시던
자기보다 먼저 동지들을 생각하고 혈육보다도 더 살틀한 정으로 대원들을 돌봐준 장철구동지였기에 누구나 그를 어머니라 부르며 따랐다.
장철구동지보다 나이가 어방없이 많은 《대통령감》까지도 《철구어머니》, 《철구어머니》라 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사실 아무것도 없는 산속에서 작식을 한다는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나
한번은
여담삼아 하신 말씀이였지만 장철구동지는 그길로 수십리나 되는 19도구까지 달려가 병풍을 뜯어가지고 돌아와
이렇듯 장철구동지는
한생을 변함없이 순결하고 진정어린 헌신으로
주작봉마루에서 투사는 오늘도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하고있다.
혁명하는 사람에게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