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2017.7.5.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민족문화유산들과 력사교양거점들을 통한 교양사업을 실속있게 하여 인민들과 청소년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와 문화, 미풍량속을 잘 알고 민족적긍지와 애국심을 깊이 간직하며 민족성을 고수해나가도록 하여야 합니다.》

선조들이 이룩한 우수한 문화적재부는 자기 나라의 력사와 문화를 대를 이어 전해가면서 사람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아주는 중요한 수단으로 된다.

반만년 우리 민족사의 갈피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정신을 지니고 외적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운 명인들의 투쟁사실이 빛나게 새겨져있다.

라선시 조산동에 보존되여있는 승전대비는 조선봉건왕조시기 애국명장으로 이름떨친 리순신장군(1545~1598)의 공적을 기념하여 세운것이다.

승전대비는 그 이름만 들어도 원쑤격멸의 기세가 솟구치고 승전의 환희가 넘치게 한다.

비석은 화강석으로 된 장방형의 받침돌(너비 1.18m)우에 높이 1.58m되는 대리석비몸을 세우고 그우에 합각지붕모양의 비머리를 올린것이다. 비의 앞면에 승전대라는 세글자가 새겨져있고 뒤면에 비문이 기록되여있다. 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호라, 여기는 고 충무공 리순신이 오랑캐를 격파한 곳이다…》

1592년 왜적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위기에 처하였을 때 일신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운 리순신장군의 공적은 조선수군사에 빛나고있다.

그러나 그가 무관으로서 외적과 겨룬 첫 싸움에 대하여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다.

리순신은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를 부지런히 하였다. 아버지 리정은 자식들이 나라를 떠받들 대들보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대바르고 굳세게 키웠다. 그의 형들은 동생의 남다른 학구열에 탄복하며 문인으로 이름날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리순신은 말공부에만 치우치는 문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천성적으로 말타기를 좋아하던 그는 무술을 닦는데 더 열성이였고 병서들도 깊이 연구하였으며 마침내 무과에 급제하였다.

당시 봉건통치배들은 안으로는 부패타락하여 인민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고 더 큰 권력과 더 많은 재물과 노비를 차지하기 위한 당파싸움을 일삼았으며 밖으로는 큰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있었다. 나라를 망치게 하는 당파싸움을 누구보다도 증오하였던 리순신은 여러 벼슬을 하면서 나라의 방위대책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였다.

리순신은 훈련원 봉사를 비롯한 여러 무관벼슬을 거치였으며 1586년에는 조산보만호(만호는 무관벼슬이름)가 되여 두만강변을 방비하게 되였다.

그가 조산포에 온 이듬해 가을이였다.

당시 이곳은 소란하기 그지없어 백성들은 불안해하고 생업을 유지하기 어려워하였다. 쩍하면 녀진족이 무리를 지어가지고 와서 목책을 에워싸고 군사들을 풀어놓아 마구 로략질을 하였다. 이런 일은 여태까지 례상사로 벌어졌으나 한다하는 무관들도 아군의 수가 적은것만 걱정하며 속수무책으로 지내온터라 마을은 또 봉변을 당할 생각으로 뒤숭숭하였다.

리순신은 록보둔전관(군대들이 자체로 농사를 지어 군량을 충당하는 일을 맡은 관리)을 겸하고있었다.

(계속 이런 일을 당할수는 없다. 이번에 결판을 내리라.)

지형을 세밀히 살펴보고난 리순신은 곧 계책을 세웠다. 진의 북쪽 3리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에 올라 적정을 살피고 적이 달아날 길목에는 복병을 나누어 배치하였다.

굶주린 녀진의 무리는 낟알을 털어 배부르게 처먹고 기껏 메고지고 저녁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지자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리순신은 매복했던 군사들에게 령을 내려 먼저 적의 우두머리를 거꾸러뜨리고 포를 쏘고 북을 울리면서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일망타진해버렸다. 그후로 적들은 겁을 먹고 다시는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후세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승전대》라고 이름짓고 여기에 비석을 다듬어세웠다.

이러한 내용을 전하면서 비문은 이렇게 쓰고있다.

《선조 20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우리 나라를 어지럽히니 임금은 피난을 가고 종묘사직은 위험에 처하였다. 공은 남먼저 일어나 적을 쳤는데 처음은 당포에서 격파하고 두번째는 한산에서 격파하였으며 세번째는 명량에서 격파하였다. 공은 비록 나라 위해 몸을 바치고 죽었으나 적들은 기가 꺾이여 다시는 달려들지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에 오늘과 같은 날이 있게 된것이 실은 공의 힘이였다.

공의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고 공적은 금석에 새길만 하다. 자그마한 한쪼각의 대(승전대를 말함)가 공의 공적의 경중을 다투는것으로 될수는 없으나 공이 기이한 계책을 내여 적을 친것은 자그마한 벼슬로부터 시작되였고 조정이 공을 알아보고 등용하여 마침내 세상에 드문 업적을 세울수 있은것은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였으니 없어지게 할수가 없다.》

후세사람들이 평가했듯이 리순신장군이 임진조국전쟁 전기간 수군을 능숙하게 지휘하여 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는데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던것은 그가 조산포만호의 자그마한 벼슬을 할 때부터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심과 출중한 군사적지략을 지녔기때문이였다.

승전대비는 리순신장군이 죽은 퍽 후인 1762년에 당시 함경도 관찰사였던 조명정에 의해 처음 세워지고 1774년에 다시 세워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1792년에 리순신장군의 5대손인 관북절도사 리관상이 고쳐세운것이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다.

기묘한 지략으로 우리 나라를 침범한 침략자들을 물리친 리순신의 첫 승전을 기록하고있는 승전대비.

정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며 침략자들에게 용서를 모르는 우리 민족의 열렬한 애국심과 기개를 전하며 비석은 예나 지금이나 승리자의 상징인양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