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민족의 전통적인 례의도덕품성

 2018.8.17.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례의지국으로 불리워왔습니다. 례의도덕을 잘 지키는것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미풍이며 전통입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21권 294페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조선민족은 일찍부터 한강토에서 하나의 피줄기를 이어가면서 독자적인 언어와 생활풍습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으며 례의도덕에서도 자기의 우수한 전통을 적극 살려 우리 민족의 나라를 일찍부터 동방례의지국으로 세상에 이름떨치게 하였다.

동방례의지국이란 예로부터 동방에 있는 례의도덕이 밝은 나라라는 뜻으로서 풍속이 아름답고 례절이 밝은 조선을 이르는 말이였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고 도덕을 귀중히 여기며 어린이를 사랑하고 늙은이를 존경하며 우애심이 깊고 이웃들사이에 서로 도와주면서 의좋게 지내는것은 예로부터 전하여내려오는 조선인민의 아름다운 도덕품성이며 민족적특성의 하나이다.

조선인민의 이러한 례의도덕품성은 일찍부터 민족적생활풍습의 하나로 형성되였으며 우리 나라 력사의 전기간 계승발전되여왔다.

원시사회에서 조선옛류형사람들은 일정한 집단을 사회생활단위로 하여 채집과 사냥, 원시적인 농업을 진행하였으며 이 과정에 자신들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능력을 높이고 사람들 호상간 사회적련계를 밀접히 하고 도덕의식을 더욱 높여나갔다.

또한 단결과 협력에 기초한 집단생활과정에 자기 집단의 한성원으로서 기쁨과 슬픔도 함께 하고 집단의 리익에 저촉되는것을 배제해나가는 강한 도덕관념과 관습을 지니였으며 그것을 마땅한 의무로, 도리로 지켜나갔다.

자연과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투쟁과정에 조선옛류형사람들속에서 형성된 이와 같은 례의도덕은 원시사회가 붕괴되고 계급이 발생되자 점차 원시공동체생활의 도덕관념에서 벗어나 일정한 계급의 리해관계를 반영하면서도 사회발전에 따르는 례의도덕을 갖추어나갈수 있게 하였다.

이 과정에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첫 계급국가로 형성된 고조선(단군조선)과 구려, 부여, 진국 등 고대국가의 주민들은 앞선 시기의 전통과 관습을 이어받으면서 사회발전에 따르는 례의도덕과 풍습을 더욱 공고발전시켜나갔다.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선악을 맡아 인간생활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하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고 한 기록은 당시 우리 선조들속에서 나쁜것을 배제하고 생활의 많은 분야에서 서로 돕고 화목하게 사는 례의도덕품성이 높은 수준에서 이미 확립되여있었으며 하나의 민족적생활풍습으로 되여갔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대시기 조선민족의 례의도덕기풍이 얼마나 높았는가는 이웃나라 사람들이 남긴 문헌기록을 통하여 잘 찾아볼수 있다.

중국의 력사문헌인 《삼국지》에는 고대 예(고조선)사람들이 품성이 착실하며 청렴하고 문과 지게문을 닫지 않아도 도적질을 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있으며 고대진국사람들은 길을 가다가도 서로 마주치면 갈길을 양보하고 고대 부여사람들은 상사가 나면 고인을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하고 령혼을 위로하는것을 례의로 한다고 전하고있다.

또한 《후한서》에는 읍락들을 침범하는자는 엄한 벌을 내려 빚을 받아내게 하였다고 전하고있으며 《삼국지》에서는 고대 부여에서 남녀가 음탕하면 죽이기까지 하였다고 하면서 고대 조선사람들의 례의도덕중시기풍을 높이 찬양하였다.

당시 고대 조선사람들의 아름다운 례의도덕이 법적으로 제정되고 지켜진데 대하여 중국의 력사문헌인 《한서》에서는 고조선에 범금8조라는 법이 있는데 사람을 죽이면 즉시 죽이고 상처를 입히면 곡식으로 보상하며 도적질한자는 남자이면 도적맞힌 집의 남종으로, 녀자이면 녀종으로 하며 속죄금을 내고 죄를 벗으려고 하는자는 50만을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죄를 벗고 다시 백성으로 되였어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겼으며 시집, 장가를 가려고 해도 대상자가 없으므로 그 나라 백성들은 아예 도적질을 하지 않고 문을 잠그고 다니지 않았으며 녀인들은 정조를 지켜 음란한짓을 하지 않았다고 전하고있다.

이것은 도적질과 같이 남에게 해되는 일을 하지 않을뿐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기면서 이웃사이에 의좋고 화목하게 살고 의리와 도덕을 귀중히 여겨온 고대조선사람들의 아름다운 도덕품성과 정조관념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는것이다.

옷차림에서도 고대 조선사람들은 자기들의 민족적감정과 정서에 맞는 고상하고 깨끗한 옷차림을 하고다니는것을 례의로 하였으며 정결하고 고상한 느낌을 주는 밝은색옷을 즐겨입었다.

혼인의례에서도 고대 조선사람들은 발전된 도덕관념을 지니고 같은 성끼리 혼인하지 않는것을 례의로 하였다.

이렇게 례의도덕이 밝은 조선인민의 생활풍습이 당시 이웃나라의 력사문헌들에 수많이 기록되여있는것은 우리 나라가 일찍부터 례의도덕이 밝은 나라로 주변나라들에도 잘 알려져있었으며 그로하여 다른 민족들의 부러움과 감탄속에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중국의 옛 문헌인 《한서》안사고의 주석에는 공자(유교창시자)가 도를 실행할수가 없어서 어질고 현명한 교화가 있으며 도(도덕)가 펼쳐지고있는 동이(조선)에 가겠다고 한 기록이 전해지고있으며 고대중국에서 출판된 《론어》, 《산해경》, 《설문》 등 도서들에서는 우리 나라를 군자국으로, 그후에 출판된 《통전》이나 《송사》에는 조선은 례의가 밝은 나라라고 기록하고있다.

당시 중국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칭찬하여 군자국이라고 이른것은 조선사람들의 풍속이 아름답고 례절이 바르다는데서부터였다.

이것은 일찍부터 우리 나라가 이웃나라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례의도덕이 밝은 나라로 알려져있었으며 우리 선조들속에서 례의도덕품성이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중세 조선민족의 례의도덕은 고대의 례의도덕을 계승하면서 보다 규범화되여갔다.

중세 조선민족의 례의도덕이 보다 전통화되고 규범화되여간것은 이 시기 례의범절과 관련한 내용들이 문헌기록들에 많이 남아있고 그것을 보다 집대성하고 규범화한 책들이 출판된 사실을 통해서 잘 찾아볼수 있다.

삼국시기 조선민족의 생활풍습에 대하여 그 풍속에 깨끗한것을 좋아하고 인사법은 끓어앉아 절을 하는것이며 장례는 후하게 한다고 한 기록들은 당시 사람들속에서 지켜지고 생활화되여있던 례의범절의 일단을 찾아볼수 있게 한다.

또한 혼인의례때에 재물을 받으면 녀자종을 파는것으로 여겨 풍속에 심히 수치로 여긴다고 한 사실과 옷의 앞과 뒤에 선을 대여 옷차림을 언제나 단정히 하고 생활하는 풍습이 있었다는 기록들은 일찍부터 전통화되여오는 아름다운 풍습과 도덕들이였다.

삼국시기의 례의도덕은 《삼국사기》의 렬전에 기록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과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성, 남녀간의 사랑을 귀중히 여기고 혼인을 례의로 한 사실, 부부간의 의리를 소중히 여기고 지켜가는 미풍량속을 통해서도 당시 사람들속에서 준수되여온 례의도덕의 면모를 잘 알수 있는것이다.

고려시기 례의도덕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일반화되고 그에 대한 사회적관심속에 례의도덕의 내용이 보충되고 규제되였으며 더욱 심화발전되였다.

고려에서는 례의도덕과 의례를 규범화하기 위한 사업을 꾸준히 하여 13세기초에는 례의도덕과 관련한 전50권의 《상정례문》을 작성하고 출판하였으며 모든 정사에 앞서 례의를 앞세우는것을 기본으로 하였다.

당시 가정들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아버지, 어머니를 잘 모시고 공양하는것을 도덕으로 여기면서 그와 어긋나는것을 엄격하게 처리하는 법조항이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보아도 고려시기 우리 인민들속에서 높이 발휘되여온 례의도덕품성을 잘 찾아볼수 있는것이다.

이것은 비록 그것이 고려봉건국가의 조치에 의하여 취해진것이지만 도덕의례규범들이 전50권으로 정립되여있었고 례의도덕을 중시하는 법조항들이 만들어져 실행되였다는것은 당시 조선민족의 높은 도덕관념과 문화발전수준을 보여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례의도덕은 전사회적규모에서 장려되였으며 그것을 규범화하기 위한 사업이 광범히 진행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례의도덕을 규범화한 《경국대전》(1485년), 《국조오례의》(1474년), 《격몽요결》(1578년), 《상례비요》(1583년), 《가례집람》(1685년), 《사례편람》(1844년), 《사례축식》(1893년) 등은 앞선시기의 례의범절에 기초하여 그것을 준수하고 장려하기 위한 국가적인 사업이 적극적으로 진행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례의와 관련한 도서들이 허례허식적인 봉건유교도덕규범의 내용들을 담고있으면서 지배계급들속에서 지켜져왔으나 근로하는 인민들속에서는 조상전래의 례의도덕이 장려되고 변함없이 계승발전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인민들속에서 지켜지고 발휘된 서로 돕고 이끌며 힘든 농사일을 해나간 공동로동풍습과 웃사람을 존경하고 아래사람을 친절하게 대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생활하는 미풍, 부모처자들사이에 서로 존경하고 위해주는 례의도덕, 손님을 따뜻히 맞이하고 대해주는 겸손하고 례절바른 례의도덕미풍은 우리 민족이 지니고있는 전통적인 도덕품성을 잘 보여주고있다.

근대시기 일제침략자들의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로 인하여 우리 민족의 례의도덕은 일대 수난을 겪게 되였지만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민족의 넋과 전통을 귀중히 여기고 끝까지 지키려는 애국적인민들의 헌신적투쟁에 의하여 자기의 명맥을 유지해나갈수 있었다.

하기에 조선봉건왕조 말엽에 우리 나라에 왔던 한 외국인이 《나는 많이 려행하였다. 에짚트에도, 북부리비아에도, 팔레스티나에도 간일이 있고 예루살렘과 디마스크에도 간 일이 있으며 중국의 남부, 중부, 북부에도, 일본에도, 몽골에도 간 일이 있다. 그러나 나는 아무데서도 조선사람들에게서와 같이 이렇게도 친절한 접대를 받아본적이 없다. 조선사람들은 려행자들이 머무는 첫날부터 마지막날까지 친절하게 접대해줌으로써 려행자들을 반하게 한다. 세상에서 이렇게도 성격상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특성을 가진 사람들을 발견하기는 힘들것이다.》라고 찬탄한 사실은 세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동방례의지국-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있는 대표적실례의 하나이다.

이처럼 조선민족이 창조하고 계승발전시켜온 전통적인 례의도덕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어렵고 힘든 일을 서로 도와주고 이웃의 경사를 축하해주며 슬픔을 함께 나누고 음식 한가지라고 생기면 서로 나누어 먹는 등 이웃간에 호상부조하고 서로 도우며 화목하게 사는 풍습과 어린이를 사랑하고 늙은이를 존경하며 남녀간의 건전한 도덕기풍을 중시하고 손님을 후대하는 미풍량속으로 일관되여있었으며 그것은 조선인민의 일상생활에서 변함없이 지켜지고 계승되여왔다.

력사적으로 형성되고 전통적으로 계승발전되여온 조선민족의 례의도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우리 조국을 찾아주시고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세워주신 후에야 우리 민족의 요구와 지향에 맞게 계승발전되였으며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인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그대로 우리 인민들의 가슴에 새겨져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는 숭고한 사상감정과 도덕이 온 사회에 차넘치게 되였다.

그리하여 우리 인민은 혁명과 건설에서 서로 돕고 이끄는 진정한 전우, 동지가 되여 피와 살도, 뼈도 서슴없이 나누어주고 생명까지도 기꺼이 바치는 동서고금에 찾아볼수 없는 미풍으로 주체조선의 참모습을 힘있게 과시하고있다.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조선민족의 례의도덕은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을 높이 모심으로써 자기 발전의 새로운 전성기에 들어서게 되였으며 오늘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탁월한 령도에 의하여 사회적으로 더욱 중시되고 주체시대의 요구에 맞게 계승발전되여 동방례의지국으로서 민족의 우수성을 더욱 높이 떨쳐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