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상아조각 《만경대고향집》은 주체66(1977)년 4월
최대의 정성과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상아조각 《만경대고향집》에는 고향집뿐만 아니라 혁명사적관이며 군함바위, 들메나무, 숲을 이른 소나무들과 만발한 꽃들, 그리고 고향집을 참관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섬세한 기교로 형상되여있어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금치 못하며 누구나 그 앞에서 좀처럼 걸음을 옮기지 못한다.
이 훌륭한 상아조각에는 만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참으로 가슴뜨거운 사연이 깃들어있다.
이 선물은 중국의 저명한 당 및 국가활동가이며 조선인민의 친근한 벗인 주은래동지의 발기에 의하여 중국공산당 지도간부들의 직접적인 관심과 지도밑에 완성되였다.
주체64(1975)년 4월 우리 나라 당 및 정부대표단을 인솔하시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친선방문하신
그는
주은래총리는
모택동주석은 주은래총리의 의견에 대하여 적극적인 찬동을 표시하였다.
그들은 거듭 론의한 끝에 정갈하고도 가장 품위있는 상아로 만경대고향집을 조각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상아조각 《만경대고향집》을 제작하는 사업은 중국공산당지도부의 직접적이고 커다란 관심밑에 진행되게 되였다.
주은래동지는 병석에 있는 몸이지만 화가들이 그린 도안을 직접 검토하고 의견을 주었으며 도안이 완성되자 모택동주석의 비준을 받아 그것을 해당 일군에게 넘겨주면서 선물을 최상의 수준에서 하루빨리 완성할데 대하여 간곡히 당부하였다.
하지만 주은래동지는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한채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모택동주석은 주은래동지가 생전에
당적으로 조각을 제작할 임무를 받은 일군들은 재능있는 96명의 공산당원들을 발동해서 상아조각을 가장 훌륭한 걸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하여 모든 정력과 최대의 성의를 쏟아부었다.
창작일군들은 사진이나 그림에서 본것만 가지고는 만경대고향집을 있는 그대로 생동하게 최상의 수준에서 형상하기가 어렵다는것을 알고 고심하던 끝에 자기들이 직접 만경대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하여 중국의 유능한 미술가들과 조각가들은 봄빛이 무르녹은 아름다운 만경대를 찾아오게 되였다.
유서깊은 혁명의 성지 만경대는 찾아오는 사람들로 꽃바다를 이루고있었다.
이렇게 만경대일대의 사적지와 사적물들을 현지에서 충분히 취재한 그들은 새로운 창작적흥분을 안고 돌아갔다.
한편 상아도 제일 좋고 제일 큰것을 구해놓고 조각을 시작하였다.
조각가들은 자기들이 현지취재에서 감명깊이 심장에 아로새긴 만경대고향집을 경건한 마음으로 눈앞에 그려보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들은 유서깊은 초가집과 혁명사적관 그리고 군함바위, 들메나무, 씨름터를 비롯한 만경대의 여러 사적물들과 만경봉의 소나무와 꽃나무들, 금붕어가 노니는 꽃늪과 참관자들의 모습 등을 생동하게 조각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쏟아부었다. 그들은 나무 한그루, 꽃잎 하나를 조각할 때에도 만경대에 가서 속사해온 표본을 보고 또 보면서 모든 심혈을 기울였으며 조금이라도 미흡한 점이 있으면 몇번씩이나 합평을 하면서 수정작업을 하였다.
조각가들은 이렇게 작품의 미세한 점 하나, 선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조각을 현실과 꼭같이 생동하게 형상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과 정열을 기울이였다.
조각을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기 위한 긴장한 노력의 낮과 밤이 계속되는 가운데 어느덧 여덟달이 지나갔다.
이때 중국인민은 모택동주석을 잃는 커다란 슬픔에 잠기게 되였다.
96명의 공산당원들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가 존경하는
드디여 1977년 3월에 상아조각 《만경대고향집》은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간부들과 당원들의 뜨거운 지성과 노력에 의하여 훌륭히 완성되였다.
그는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의 뜻을 받들어 존경하는
상아조각 《만경대고향집》에는 한평생 조국의 해방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쳐오신
국제친선전람관을 참관한 세네갈정부대표단 단장은 《상아조각 〈만경대고향집〉은 참으로 훌륭합니다.
상아로 이런 훌륭한 선물을 마련하기까지에 깃든 정성이야 얼마나 컸겠습니까. 작품의 모든 세부들이 살아 움직이는것만 같습니다.》라고 자기의 감정을 토로하였다.
오늘도 상아조각 《만경대고향집》은 국제친선전람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감명을 불러일으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