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 북방의 어느 한 광산에 출장갔던 한 일군이 로동자들이 일하는 생산현장의 환경이 한심한데 대해
이 사실을 보고받으신
이렇게 되여 주체71(1982)년 12월 9일 예견치 않았던 회의가 소집되게 되였다.
회의에서는 그 광산의 실태가 통보되고 로동자들의 로동조건에 무관심한 도당책임일군이 집중비판을 받았다.
회의가 끝나자
깊은 밤이였다.
자책에 잠겨 머리도 들지 못하고있는 그 일군을 이윽히 바라보시던
자주 가보았지만 그에 대해 범상하게 생각하였다는 말을 들으신
일을 잘하지 못하여 면목이 없다고 말씀올리는 그 일군에게
그러시면서 이제 날이 밝으면 다른 도당책임일군들과 정무원 위원회, 부 책임일군들이 함께 광산에 가서 로동자들을 모여놓고 동무가 일군들을 대표하여 잘못을 빌어야 한다고, 일군들의 잘못에 대한 판결권은 로동자들에게 있다고, 로동자들이 잘못을 너그럽게 리해하여준다면 용서를 받을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어쩔수 없다고 교시하시였다.
다음날 광산문화회관에서는 광산로동자들과 함께 중앙과 지방의 책임일군들이 참가한 가운데 류다른 사죄모임이 진행되였다.
도당책임일군이 자기들이 내려오게 된 경위에 대하여 설명한 다음 로동보호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했던 잘못을 심각히 비판하고 용서를 빌면서 자기에 대한 《판결권》을 로동자들에게 맡겼다.
조용하던 장내의 여기저기에서 흐느낌소리가 들렸다.
로동자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도당책임일군의 두손을 부여잡고 자기들때문에
사죄모임은 충성의 결의모임으로 되였다.
도의 책임일군이 평양에 올라와 사죄모임정형에 대하여 보고올리자
자기 잘못을 깨닫고도 남은 일군이였으나 그 물으심에는 선뜻 대답을 드릴수 없었다. 그 건조장을 현대적으로 개조하자면 얼마만한 시일이 걸려야 하며 그로 하여 나라의 경제발전에 얼마나 큰 지장을 주게 될것인가에 대하여 잘 알고있었기때문이였다.
우물쭈물하는 그의 심중을 헤아리신
이리하여 광산의 흑연건조장을 개조하는 사업이 즉시에 벌어지게 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모든 단위들에서 로동조건을 보다 훌륭하게 개선하기 위한 일대 선풍이 일어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