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력사학부 최성우
2023.4.6.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우리 수령님은 대해같은 넓은 도량과 포옹력을 지닌 성인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품은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한품에 안아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한없이 넓고 은혜로운 품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한없이 넓고 은혜로운 품에 안겨 애국자로 생을 빛내인 사람들중에는 파란많은 인생의 곡절을 거쳐 조국의 품에 안긴 세계프로레스링왕자 력도산(1920. 11. 14 -1963. 12. 15.)도 있다.
력도산은 조선사람이며 그의 고향은 함경남도 홍원군이고 본명은 김신락이였다. 해방전인 1939년 2월에 살길을 찾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처음에 일본에 가서 일본씨름선수생활을 하다가 1950년부터 프로레스링을 시작하였다. 프로레스링계로 진출한 력도산은 1950년대초부터 10여년간 세계프로레스링선수권을 련속 5번, 국제프로레스링강자대항전 선수권을 무려 19번이나 쟁취하고 총 136번의 경기에 출전하여 3번 비기고 모두 이기여 세계프로레스링계의 왕자로, 무적의 사나이로 세계체육계의 인기를 독점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황금소나기를 맞아 일본에서 손꼽히는 갑부로 되였다.
그러나 그가 얻은 명성도 수억만금의 재산도 조선사람으로 태여나 일본국적을 가지고 지난날 조선을 식민지로 악독하게 통치하였던 일본을 위하여 출전해야 하는 커다란 마음속고충을 가셔주지 못하였다.
력도산이 일본선수로 출전하여 승리를 거둘 때마다 일본사람들은 환성을 올렸으나 재일조선동포들속에서는 《당신은 일본사람인가, 조선사람인가?》하는 격노에 찬 웨침이 터져나왔고 그는 《조국이 없는 사람》, 민족의 배신자라는 수치스러운 말을 들어야 했으며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고무신 한컬레도 사드릴수 없는 가슴속아픔에 모대기였다
력도산의 이러한 마음속고충을 헤아리시고 치욕의 길을 걷고있던 그를 애국의 길에 들어서게 하신 분은 대해같은 도량과 포옹력을 지니시고 온 민족을 한품에 안아 보살펴주신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이시였다.
모두가 력도산을 믿지 않고 지어 민족의 배신자, 반역자라고 하며 격분을 금치 못하고있을 때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일본선수라는 욕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는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통치가 빚어낸 후과이라고, 일본반동들의 책동때문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력도산은 물론 조국에 있는 그의 딸과 친척들도 믿는다고, 아버지와 딸이 서로 만나 혈연의 정을 나누도록 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배려에 의하여 력도산의 딸은 아버지와 감격적으로 상봉하게 되였다. 력도산과 만난 자리에서 딸은 아버지가 남의 나라를 위해 본의아니게 경기를 한것은 식민지통치가 빚어낸 후과라고 위대한 수령님께서 평가하신데 대해서와 오늘의 이 상봉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마련해주신것이라는데 대하여 눈물을 머금고 이야기하였다.
딸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있던 력도산은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그렇게 평가하시였단말이냐.》라고 하면서 격정을 금치 못했다. 딸을 통하여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한품에 안아 운명을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한없이 넓은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품에 대하여 알게 된 력도산은 자기를 믿어준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을 눈에 흙이 들어가도 잊지 않겠다고, 조선사람인 자기는 조선사람으로 돌아와 살겠다고 굳은 결심을 피력하였다.
력도산은 위대한 수령님을 재생의 은인으로, 민족의 어버이로 높이 모시고 따르며 애국의 길에서 생을 빛내일 확고한 결심을 담아 주체51(1962)년 4월 15일에 위대한 수령님 탄생 50돐을 맞으며 위대한 수령님께 자기의 결의를 담은 맹세문과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 만세!》라고 자필로 쓴 서예품, 고급승용차를 선물로 드리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52(1963)년 9월에 력도산의 경기장면을 보시면서 력도산은 위대한 수령님을 열렬히 흠모하며 따르고있다고, 프로레스링경기에 나선 력도산이 미국선수를 때려눕히는 장면을 보면 누구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될것이라고 하시면서 프로레스링강자 력도산은 민족적량심을 지닌 조선사람이라는 과분한 평가를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를 전달받은 딸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편지로 전하였다. 딸의 편지를 받고 감격에 젖어 력도산은 1963년 10월에 딸에게 보낸 회답편지에서 《…이 아버지가 아무리 프로레스링패권을 쥐였다고 해도 〈일본국적〉을 가지고 〈일본선수〉로 경기에 출전한 떳떳치 못한 과거야 어디 가겠니. 그런데 친애하는 김정일선생님께서는 이 사실을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나의 경기에서 조선사람의 기개를 보시였을뿐 아니라 애국충성을 맹세다진 나의 결의까지 높이 평가해주시였다니 그 고마움을 어떻게 다 말할수 있겠느냐》라고 썼다. 그리고 자기는 조선사람으로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친애하는 김정일선생님의 하늘같은 믿음에 한목숨 바쳐서라도 보답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였다.
그후 력도산은 일본반동들의 협박과 모략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귀국하겠다는 의사를 떳떳히 공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반동들은 1963년 12월에 깡패들을 내세워 칼로 찔러 그를 살해하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일본반동들은 칼에 찔려 병원에 실려간 력도산에게 이제라도 마음을 되돌려세우면 살수 있다고 유혹하였지만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키였다.
림종의 시각에 자기를 찾아온 동포에게 력도산은 《나는 내가 왜 죽는지 알고있다. 내가 조선사람이기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조선사람이다. 력도산이 아니라 김신락이다. 내가 프로레스링왕자로 될수 있은것은 바로 조선사람이였기때문이다. 나는 이제 죽을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과 김정일선생님을 모신 조선사람으로 살다가 죽는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다만 한스러운것은 조국에 가보지 못하고 죽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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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이 오면 아버지는 조국도, 자기 량심도 배반하지 않고 조선사람으로 꿋꿋이 살다가 죽었다고 전해달라.》라고 하였다.
력도산이 일본반동들의 손에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들으시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누구보다 가슴아파하시며 자신의 존함이 새겨진 렬사증을 딸에게 수여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59(1970)년 5월에는 력도산의 삶에 대한 뜻깊은 교시를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도산의 생활은 사람이 자기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교훈적인 대답을 주는 생활이였다고 하시면서 력도산의 곡절많은 생활은 참된 삶의 보람도 행복도, 인간의 존엄과 영예도 오직 조국의 품속에서만 찾을수도 빛내일수도 있으며 조국의 품을 떠난 사람은 설사 영웅호걸이라 하더라도 보람있고 행복하게, 사람답게 살수 없다는것을 보여준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때 력도산의 인기는 대단하였다고, 아마 프로레스링계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체육계에서 력도산만큼 큰 인기를 끈 사람은 드물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는 프로레스링왕자로서 명성을 떨치였을뿐 아니라 많은 돈을 벌어 일본에서 8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부자가 되였다고, 그러나 그 모든 인기와 재부는 일본사람의 이름으로 일본을 위하여 경기에 나가 이긴 대가로 얻어진것이였다고 하시였다. 그렇기때문에 프로레스링왕자로서 인기가 올라가면 갈수록, 황금소나기가 쏟아지면 질수록 자기를 낳아 키워준 어머니와 고향과 자기 민족을 등진 배신감과 치욕은 더욱 커갔다고, 력도산은 늦게나마 이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하시였다.
계속하시여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력도산은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속에서 재생의 기쁨을 받아안은 사람이라고, 그의 극적인 인생전환과 한생은 위대한 수령님의 믿음이야말로 우리 인민, 우리 민족의 생명이며 삶의 전부라는것을 그대로 말해주고있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사실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이 아니였다면 력도산은 나라와 민족을 등진 인간으로서 비극적인 운명을 면치 못하였을것이라고, 비록 본의는 아니였지만 그가 세계프로레스링왕자로서 수많은 경기에서 일장기를 올리게 하여 우리 사람들 특히 재일동포들의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였다고, 겨레가 체험한 그 수치와 모욕감, 분노를 다 계산한다면 무엇으로써도 보상할수 없을것이라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러나 우리 당은 지난날에 지은 죄나 공적에 대하여 산수적으로 계산하여 사람을 대하지 않는다고, 우리 당은 과거경력을 산수적으로 계산해보고 사람을 믿고 안믿고 하는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 놓여있는 마음을 보며 사람의 마음도 지난날의 마음보다 오늘의 마음을 더 귀중히 여긴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비록 지난날에는 칼을 품고있던 사람도 오늘은 자기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깨끗한 량심을 가지고 우리 당을 따라오겠다고 하면 대담하게 믿어주고 안아주는것이 우리 수령님의 믿음이며 사랑이라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는 죽기 전에 보내온 편지에 자기 고향이 만경대에서 가까운 곳이라고 썼다고, 홍원군에서 태여난 그가 그렇게 쓴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품이야말로 진정한 고향이고 조국이라는것을 깨달았기때문이였다고 하시였다.
이처럼 일본반동들의 모략에 걸려든것으로 하여 조국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도 민족의 배신자라는 치욕을 안은채 몸부림치던 력도산은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서 조국의 참된 아들로, 수령님을 위하여서라면 목숨도 서슴없이 바칠줄 아는 투사로 자라났으며 조국과 더불어 영생하게 되였다.
정녕 위대한 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품은 대해같은 넓은 도량과 포옹력으로 지난날 치욕의 길을 걷고있던 력도산을 애국자로 내세워주시고 그 삶을 빛내이도록 하여주신 위대한 태양의 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