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우리 나라 력사에서 우리 민족이 제일 강하였던 시기는 고구려시기였습니다. 고구려는 동아세아의 넓은 령토와 많은 주민을 차지한 강대국이였습니다.》 (
지난날 우리 나라 력사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강하였던 시기는 고구려시기였다. 고구려는 삼국가운데서 가장 일찌기 성립된 봉건국가로서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함으로써 동방에서 넓은 령토와 주민을 차지한 강대한 나라로 이름을 떨치였다.
국력이 강하고 그 누구도 건드릴수 없는 높은 존엄과 권위를 지닌 위력한 나라가 강대국이다. B.C. 277년에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로 발족한 고구려는 동아시아대륙의 넓은 지역에 분포되여있던 크고작은 국가들과 정치세력들을 통합하여 넓은 령토와 많은 주민들을 차지한 강대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그 전성기인 6~7세기에 남쪽으로 조선반도 중부지방, 북쪽으로는 흑룡강류역, 서쪽으로는 대흥안령산줄기이동 내몽고지역까지 자기의 령토 또는 속령으로 삼아 동서 6 000리, 남북 4 000리의 령토와 주민을 포괄한 강대국으로 위세를 떨치였다.
고구려는 당당한 주권국가로서 제기되는 모든 대내외적문제들을 독자적인 판단과 결심에 따라 처리하였다.
고구려통치기구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국왕은 황제급의 대왕이였다.
일반적으로 국왕이 국가권력의 대표자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봉건전제국가에서는 주로 최고통치자인 국왕의 지위에 따라 권력구조가 황제국가의 틀을 취하거나 제후국의 틀을 취하여 그 형식을 달리하였다. 물론 봉건사회에서 그것이 어떤 형식을 취하든 군주적인 통치형식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에 따라 국가의 대외적지위가 달라지기때문에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왜냐하면 황제는 령주나 왕 또는 제후로 불리우는 소왕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하는 군주를 소왕이나 제후를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리해되고있기때문이다.
고구려대왕의 지위는 대국주의자들과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력사기록에 전면적으로 외곡되였다.
그러나 고구려대왕의 지위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의연히 남아있다.
력사기록들에 의하면 고구려왕은 대왕이였으며 대왕은 천자였고 황제였다. 동명왕을 동명성왕 또는 동명성제, 동명제라고 한것은 결코 고구려이후시기에 와서 만들어낸 칭호가 아니다. 《수서》 고구려전에는 고국원왕(331~371년)을 소렬제라고 불렀다고 명백히 밝히고있으며 소수림왕때에는 년호를 제정하였다고 하였다.
소수림왕(371~384년)은 즉위이후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부왕에게 소렬제라는 칭호를 추증하였다.
고구려는 이처럼 국왕에 대하여 《제》, 《성제》라는 칭호를 썼다. 그러나 국내에서 일상적으로는 여전히 《대왕》칭호를 많이 썼다. 《삼국사기》의 류리명왕(B.C. 19~A.D. 18년), 대무신왕(18~44년), 태조대왕(53~146년), 고국천왕(179~197년), 산상왕(197~227년),봉상왕(292~300년)기들에는 고구려왕을 《대왕》으로 불렀던 사실들을 기록하고있다. 광개토왕(391~412년)이 《영락대왕》, 《영락태왕》 등으로 불리운것도 그러한 실례의 하나이다. 장수왕(413~491년), 문자명왕(492~519년)시기에도 《고려대왕》, 《고려태왕》이라고 불렀던 사실이 중원고구려비에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국왕의 어머니를 《태후》, 안해를 《후》, 왕위계승자를 《태자》라고 한 기록이 있다. 《대비》, 《비》, 《세자》는 제후국에 해당한 명칭이고 《태후》, 《후》, 《태자》는 황제국에서만 쓸수 있는 명칭이다.
이것은 고구려왕의 황제적지위를 보여주는 동시에 고구려통치기구가 황제국가의 골격을 갖추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강대한 나라 고구려의 국왕이 자국내에서는 물론 중국동쪽의 여러 나라들에 대하여 천자(대왕)행세를 하였다는것은 널리 알려져있는 사실이다.
고구려는 후국제도를 두었다.
후국은 대왕밑에서 제후가 다스리는 나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후국은 황제의 지배밑에 있는 제후국으로서 황제국의 통치형태를 상징하는 기본징표의 하나이다.
고구려의 대왕은 건국초기에 벌써 다물후를 비롯한 여러 후왕들을 복속시키고있었으며 그후에도 고구려의 력대왕들이 책봉한 제후들이 있었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고구려는 강대한 나라로써 한때 백제, 신라, 동부여를 《속민》, 《노객》으로 인정하였으며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아들이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국왕이 처음부터 제후들우에 군림한 황제적존재였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고구려통치기구가 황제국가의 틀을 갖추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고구려는 년호를 사용하였다.
봉건시대에 년호는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즉위하면서 붙이는 칭호였다. 년호는 황제만이 《건원칭제》할수 있고 제후는 황제의 년호를 사용하게 되여있었다. 그러므로 년호는 최고통치자의 지위와 나라의 독자성문제와 관련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광개토왕릉비, 증원고구려비와 《삼국사기》를 비롯한 력사기록들에 의하면 고구려 소수림왕통치시기(371~384년)에는 《건시》, 《태녕》이라는 년호를 사용하였으며 광개토왕통치시기(391~412년)에는 《영락》, 장수왕통치시기(413~491년)에는 《연가》, 《연수》, 양원왕통치시기(545~559년)에는 《연강》 등의 년호를 썼다. 이것은 당당히 《건원칭제》한 고구려왕의 황제적지위를 보여주는 동시에 고구려가 강대국의 통치체계를 갖추고있었다는것을 말해준다.
고구려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다. 《제천의식》은 봉건시기에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봉건적례의범절과 의식절차에 관한 규정을 수록한 《례기》(고대중국의 유교경전)에 의하면 《제후》는 산천에 제사지내고 《황제》는 하늘에 제사지내게 되여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고구려가 《제천의식》을 거행한 기록을 전한다.
이것은 고구려왕이 《천자례식》을 거행하는 황제적지위에 있은 대왕이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이렇듯 고구려왕은 당당히 《건원칭제》를 하고 《천자례식》을 거행하면서 후왕들우에 군림한 대왕이였으며 고구려는 강대국에 어울리는 통치기구를 갖추고 독자적인 대내외정책을 집행하였다.
고구려의 독자적인 대내외정책은 강력한 군사력에 의하여 담보되였다.
강력한 군사력은 강대국의 필수적징표의 하나이다.
고구려는 봉건국가의 대내외적안전을 수호할수 있는 강유력한 군사력을 가지고있었다.
고구려는 전체 주민들에 대한 의무병역제를 기본으로 하면서 여기에 모병제, 선군제를 결합하여 군대의 인적력량을 시종일관 강화하였다. 의무병역제, 모병제, 선군제는 인민들속에서 발양된 상무기풍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다.
고구려사람들은 슬기롭고 용맹하였을뿐만아니라 조국방위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것을 가장 영예로운 일로 생각하였다. 때문에 그들은 무술을 배우는것을 남자들의 의무로 여기고 어려서부터 달리기와 말타기, 활쏘기와 칼쓰기를 배웠으며 민간오락들과 경기들도 모두 무술을 기본으로 하였다.
고구려는 인민들속에서 발양된 상무기풍을 적극 장려하였다. 무술에 뛰여난 사람들을 군대에 자원입대시키는 제도인 모병제와 무술에 뛰여난 사람들을 선발하여 군대에 입대시키는 제도인 선군제를 실시한것은 이것을 실증하여준다.
고구려에서 실시한 봉건적병역제도는 상무적기풍과 결합되여 실제적효력을 나타냈다. 고구려사람들속에서 상무적기풍이 널리 발양되였기때문에 봉건국가는 평시뿐아니라 전시에도 전투력있는 대오를 편성할수 있었다.
이것은 봉건적병역제를 효과적으로 실현할수 있는 담보였다. 봉건적병역제는 필요한 군정의 수를 확보할수 있게 하였다면 상무의 기풍은 군대의 질을 높이게 한 결정적요인의 하나였다.
고구려군대에는 군사우위제에 의하여 편성되는 전업군인 즉 무사층이 상당히 많았다. 무술이 뛰여난 사람은 아무때나 군인으로 될수 있었으며 입대기준도 무술을 기본으로 하였고 신분에 크게 구애되지 않았다. 무사층은 국가로부터 벼슬 또는 기타 특전을 받고 하나의 신분층으로 고착될수 있었다. 이것은 강력한 군대를 계속 유지강화하기 위한 바탕으로 되였다.
고구려는 군대에 대한 정연한 중앙집권적지휘체계를 세우고 무관을 중시하였다. 최고의 군사지휘권은 국왕에게 있었으며 《부왕적관리》들은 왕을 도와 군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은 행정관과 군사지휘관을 겸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문관과 무관사이의 차별이 없었을뿐아니라 국가통치와 군사지휘에서 무관이 우위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중추를 문관이 차지하고 군사지휘의 실권과 군사행정과 관련된 높은 벼슬자리를 문관이 독차지하는것과 같은 사태는 빚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권력을 장악유지하는데서나 무력을 지휘통솔하는데서 대체로 무관이 문관에 비하여 우위를 차지하였다.
고구려에서는 고정된 장수가 고정된 부하를 거느리는 제도가 유지되였으며 관료통치제도전반에서 부대를 직접 지휘하는 군사장관의 비중이 매우 컸다. 큰 부대를 지휘하는 대당주와 주급의 장관인 녹살이 모두 정부안에서 큰 권한을 행사하는 특권관료층, 제1관료층과 같은 높은 급의 벼슬등급을 가지고있었다.
고구려는 기동전에 대치할수 있게 군대를 편성강화하였다.
부대와 전투기술기재의 높은 기동력을 리용하여 한곳에 머물러있지 않고 빨리 이동하면서 적을 치는것은 전투승리의 결정적요인의 하나이다.
고구려는 군대의 기동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기병을 조직하고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병종구성에서는 기병의 비중이 매우 컸다.
력사적으로 강대한 적들을 대상으로 하여 많은 싸움을 벌리였고 성을 지켜내기 위한 싸움뿐만아니라 벌판에서 정면회전, 추격전, 장거리원정 등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여러 사정과 조건으로 하여 고구려는 건국초기부터 많은 기병을 조직하고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전투들에서 기병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력사기록에 의하면 9년 고구려가 선비족을 칠 때 《국왕(류리왕 1년)이 직접 용맹한 기병을 거느렸다》고 하였으며 172년(신대왕 8년) 명림답부가 지휘한 고구려기병 수천명이 퇴각하는 한나라군을 추격하여 전멸시켰으며 184년(고국천왕 6년) 한나라 료동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국왕이 직접 정예한 기병을 거느리고 나가 싸워이겼다고 전한다. 645년 당나라군대와 싸우는 안시성의 고구려군을 도우려 간 15만의 전투부대에는 5만필의 말과 함께 5만필의 소가 있었다고 전한다.
력사기록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구려의 강력한 기병대는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는 당시로서는 우수한 무기, 무장으로 군대를 장비하였다.
군대를 우수한 무기, 무장으로 장비하는것은 침략자들을 쳐물리치고 나라를 지킬수 있는 중요한 담보의 하나로 된다.
고구려군대가 장비한 무기와 무장은 당시로서는 그 성능과 위력이 강한것으로 널리 알려져있었다. 특히 《맥궁》, 《각궁》, 《쇠뇌》, 《갑옷》, 《투구》, 《방패》 등이 널리 알려져있다. 고구려에서는 활과 쇠뇌를 먼거리무기로 널리 리용하였다. 고구려의 활은 몇토막의 나무를 이어서 만든 《복합궁》이였는데 그 탄력이 매우 세서 《맥궁》이라는 이름으로 외국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고구려의 쇠뇌(가계활)는 우수한 무기로 널리 알려졌다. 자강도 전천군 운송리유적에서는 B.C. 1세기-A.D. 1세기의 유물인 1개의 쇠뇌(노)가 발굴되였고 평양시 정백동 1호무덤과 8호무덤 및 37호 무덤에서는 각각 2개의 쇠뇌가 발굴되였는데 이것은 구조와 가공술이 매우 우수하다는것을 보여준다. 이 쇠뇌들에는 오늘날의 무기들에서 볼수 있는 조준선까지 새겨져있다.
고구려는 정연한 성방위체계를 갖추고있었다.
나라의 모든 지역에 철벽같은 방위시설을 구축하여 어느때 어디로 적이 쳐들어와도 그것을 일격에 물리칠수 있도록 요새화하는것은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책동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중요한 방도의 하나이다.
강대한 군력을 가진 고구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점들에 많은 성들을 쌓아 정연한 성방위체계를 구축하고 외래침략자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일격에 쳐물리쳤다.
고구려에는 적어도 200개이상의 성이 있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고구려성의 총수는 189개나 된다. 그리고 광개토왕릉비에서도 《삼국사기》에 중복되지 않는 66개의 성을 찾아볼수 있다. 이 자료만 놓고보더라도 고구려에는 255개의 성이 있었던것으로 된다. 《구당서》 동이전 고구려조와 《신당서》 동이전 고구려조에서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강점하였을 때 그들이 강점한 고구려의 성은 176개였다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이 장악하지 못한 성까지 합치면 더 많은 성이 있었다는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성들은 산성, 평지성, 도성(읍성), 관성, 장성, 책성 등 여러가지 성곽을 이루었다. 이러한 성곽시설들에는 병력들이 일상적으로 배치되여있었다.
고구려가 근 1 000년간의 력사를 통하여 수많이 쳐들어온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의 독립과 자주권을 고수한 강대국으로 이름떨칠수 있었던것은 이처럼 중앙과 지방에 견고한 방위시설들을 구축하고 군사력을 끊임없이 강화하였으며 발전된 경제력에 기초하여 필요한 군량과 무기, 무장을 제때에 보급하였기때문이다.
본바와 같이 고구려는 당당한 주권국가로서 오래동안 령토의 안정과 민족적자주권을 수호한 동방의 강대국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