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발해시기 우리 나라의 수공업발전

 2015.10.3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7세기말부터 1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나라 력사발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권 37~38페지)

발해시기 수공업발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것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잘 알고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높이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발해국은 698년부터 근 230년동안 존재하면서 고구려에 대등한 넓은 령토와 강대한 국력을 가진 《해동성국》으로 그 위용을 떨치였다.

발해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서 넓은 령토와 풍부한 물산, 높은 문화로 하여 자기의 발전된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발해의 발전된 경제와 문화는 우리 선조들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이 반영되여있는 수공업기술발전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다.

발해시기 수공업발전은 첫째로, 광업 및 제철제련업에서 찾아볼수 있다.

넓은 령토를 가지고있던 발해 각지에는 이미 고구려때부터 개발리용되여오던 수많은 철, 금, 은, 연, 동광산들이 있었고 또 새로 발견되여 개발된 광산들도 많았다. 발해의 수공업자들은 이러한 광산들에서 각종 광물들을 채취하였으며 제철, 제련기술을 발전시켜나갔다.

《신당서》(권219) 발해전에 의하면 《위성의 철》은 발해사람들이 높이 일러주던 질좋은 철이였다. 《료사》(권38) 지리지에는 위성이 바로 현덕부 철주소속의 4개 현의 하나였음을 밝히고있다.

20세기에 와서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중국 료동성일대에서 제철용으로 썼던 도가니파편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발해사람들의 제철기술이 높았던 사실은 11세기초에 송나라사람 왕증이 발해사람들의 제철술을 보고 감탄한 사실을 가지고도 말할수 있다.

발해시기의 중요동생산지에는 로련의 연해주일대가 속하였는데 이곳에서는 각종 청동제품과 도가니, 거푸집, 용해물찌꺼기유물들이 나왔다. 발해에서 동제련법은 1차제련에 의한 조동을 정련로에서 다시 제련하여 잘 정제된 숙동을 생산하는 방법이였다. 발해의 수공업장공인들은 이와 같이 생산한 동을 합금하여 청동거울, 백동거울, 장식못, 머리꽂이, 숟가락, 말탄사람모형의 주물품, 방울고리, 받치개쇠 등 가정생활도구와 장식품, 관상용품들을 훌륭하게 제작하였던것이다. 실례로 청동으로 제작한 기마인물주물품은 그 높이가 5.2㎝밖에 안되는 달아매는 작은 치레거리였지만 말과 말장식 그리고 말탄 사람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섬세한 수법으로 생동하게 형상한것으로서 수공업장공인들의 기발한 착상과 높은 주조기술을 보여주고있다.

발해에서는 은제련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발전된 은야법에 의하여 진행되였는데 현대의 아말감법에 의한 제련과 같은 앞선 제련방법을 널리 도입하였다.

은야법이란 은정광에 수은을 작용시켜 은을 모이게 한 다음 자루에 넣어 압착하여 수은과 잡물을 제거하고 가열하여 은덩어리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자료에 의하면 두만강 건너편의 훈춘일대, 량강도 갑산일대, 함주일대는 발해시기의 금, 은, 동, 연 등의 광물산지였다고 한다.

발해의 국력이 강하였던것은 이러한 광물-금속생산량이 많았던것과 중요하게 관련되여있다.

발해시기 수공업발전은 둘째로, 직조수공업이 발전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발해인민들은 고구려시기의 직조수공업기술의 전통을 이어받아 삼, 모시 등 섬유식물을 널리 재배하였고 뽕나무를 가꾸어 누에를 쳤으며 압록강기슭 등 일부 지역에서는 가둑누에도 쳤다.

《신당서》발해전에 의하면 발해에서는 현주의 베, 옥주의 솜, 룡주의 비단이 각각 지방특산물로 알려지고있었다.

《현주의 베》가 유명하였다고 한것으로 보아 중경현덕부의 중심지이며 오늘의 길림성 화룡현일대가 소문난 베천생산지였다고 볼수 있다. 발해가 멸망한 직후 거란에서 해마다 추포 10만단과 세포 5만필을 략탈해갔다는 력사기록은 발해가 한창 륭성할 때에는 베천생산이 더 많았을것이라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다.

발해인민들은 흰모시(백저)와 함께 갖가지 고급비단과 모직물도 생산하였다. 《신당서》발해전에는 비단천인 견직물의 대표적산지가 룡주이며 솜생산의 중심지가 옥주라고 씌여있다. 옥주는 오늘의 함경도에 해당하는 지대로서 고조선과 고구려시기의 잠업전통이 발해에 그대로 이어져 명주솜을 많이 만들어 리용하였다. 룡주는 수도 상경룡천부의 중심지로서 이 지역에서는 어아주, 조하주를 비롯한 우수한 비단제품들이 많이 생산되였는데 《룡주의 비단》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밖에도 발해의 수공업자들은 극히 보드라운 털로 짠 고급모직물인 체, 털끝이 일어나게 짠 계를 비롯한 각종 모직물도 생산하였다.

928년 백저포를 거란에 보냈으며 발해의 가는베, 모시, 고급비단, 고급모직천들이 당나라, 일본 등과의 외교, 무역거래에 리용되였다는 사실은 발해시기의 직조기술을 잘 보여주고있다.

발해시기 수공업발전은 셋째로, 요업기술이 발전한데서도 찾아볼수 있다.

발해의 요업부문 수공업자들은 고구려시기의 요업기술을 더한층 발전시켜 여러가지 질그릇제작에서 칠물을 보다 광범히 도입하였으며 기와, 벽돌생산에서도 새 경지를 개척하였다.

발해사람들은 우선 일상생활과 각종 생산에 필요한 질그릇들을 다양하게 만들어내였다.

발해에서는 고구려시기의 전통을 이어 다양한 종류와 형태, 무늬를 가진 검은재색도기와 재빛도는 밤색도기를 능란하게 제조하였다.

발해시기의 질그릇유물로서는 보시기, 여러가지 형태의 단지, 버치, 그릇뚜껑들이 발견되였다. 보시기에는 몸체가 곧추 퍼져 올라간것과 배가 약간 부르게 된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오늘의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발해도기의 특색의 하나는 시유도기(칠물바른 질그릇)가 많은것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바탕흙이 매우 부드럽고 흰재색 또는 누른재색을 띠고있으며 안팎에 여러가지 색갈의 칠물을 발라 세련되고 우아한 감을 주고있다.

발해사람들은 또한 선행한 고구려의 굳세고 웅대한 기상을 반영한 기와, 벽돌제조수법을 계승하여 그것을 자기식으로 발전시켰다.

발해의 수공업자들은 재색기와, 칠물바른 기와, 장식기와 같은 여러가지 종류의 기와들을 훌륭히 만들어내였다. 북청군 평리 거산성터에서 나온 발해기와는 그 두께가 0.8㎝밖에 안되는 얇고 가벼운것이지만 돌처럼 굳어서 강하게 때려도 잘 깨지지 않는다. 이것은 같은 성터에서 나온 고구려식붉은기와와 꼭 같은 노끈무늬로 되였으나 그 질은 전혀 다르며 두드리면 쇠소리가 난다. 이것은 기와제작에서의 큰 진보라고 말할수 있다. 암기와제작에서 기술적진보를 이룩한 흔적은 앞이 넓고 뒤가 좁게 만든것인데 이것은 기와의 경량화, 기와잇는 작업의 능률화를 목적으로 한것이다. 발해의 수공업자들은 비물이 기와속에 스며들어 빨리 부식되는 현상을 극복하는데도 세심한 주의를 돌렸다.

발해의 기와장공인들이 고구려기와를 더한층 발전시킨것의 하나는 장식기와이다. 그중에도 치미, 괴면, 장식화판 등이 특수하다. 상경성 제1, 9절터들에서는 치미와 괴면이 나왔다. 치미는 형태가 독특하여 건물의 미관을 돋구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괴면은 추녀마루 장식기와인데 도깨비얼굴을 상징하여 《벽사》(나쁜것을 쫓는것)용으로 리용하였다. 장식화판은 건물의 벽면 등을 보다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발해의 요업장공인들은 벽돌제조에서도 남다른 솜씨를 발휘하였다. 벽돌에는 푸른재색벽돌이 많으나 붉은빛이 도는것, 검은빛이 도는것, 누른 보라색의것도 있으며 형태는 장방형, 방형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발해사람들은 벽돌도 고구려시기의 비교적 단순한 기하학적무늬대신 예술적인 넝쿨무늬, 보상화무늬 등을 새김으로써 건물들의 미를 더한층 돋구었다.

발해의 도기, 기와, 벽돌류의 특징은 굳고 든든하다는것, 무늬의 형상수법이 정연하고 조화가 맞으면서 깨끗하다는것 등이다. 발해의 이 특징은 전투적이고 활달한 고구려적성격을 계승하였다고 볼수 있다.

발해에서는 그밖에도 배무이수공업, 가죽가공업, 구슬가공업 등에서 높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에서는 우리 인민들의 높은 애국심과 창조적지혜로 세계에 자랑할만 한 우수한 수공업제품들을 훌륭히 만들어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