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자는 백온, 호는 고균, 본은 안동, 1851-1894)은 우리 나라 근대부르죠아계몽사상인 개화사상의 대표자이며 《부국강병》의 실현으로 민족의 자주권고수를 주장한 애국자이다.
당시 우리 나라는 사회의 근대화를 실현하는 문제가 사회발전의 성숙된 요구로 나서고 이를 반영하여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적움직임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던 력사적환경에 처하여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미제와 일제를 비롯한 자본주의렬강들이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깊숙히 뻗치였다. 그리하여 민족의 자주권이 엄중히 유린되였으며 나라의 근대화를 실현하기 위한 사업에 커다란 난관이 조성되였다.
이러한 환경으로부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는 문제가 절박한 실천적요구로 나서게 되였다.
김옥균은 이러한 실천적요구를 반영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외세의 침략을 반대하고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기 위한 반침략애국사상을 중요하게 제기하였다.
《…우리 인민의 력사는 고대와 중세에 있어서는 북으로는 수, 당의 침략과 거란, 원의 침략을 물리치고 남으로는 왜적의 침공을 견제하여온 반침략, 조국방위의 력사로 되였으며 근세에 와서는 일본제국주의자들과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을 반대하는 반제투쟁의 력사, 민족해방투쟁의 력사로 되였습니다.》 (《
김옥균의 반침략애국사상은 우선 그가 기본정치강령으로써 《자수자강》, 《부국강병》을 주장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자수자강》은 자체의 힘을 키워 자신을 강하게 만든다는것이며 《부국강병》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군사력을 강화해나간다는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하여 자기의 힘을 키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며 그 힘에 의거하여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나라의 독립을 지켜낸다는것이다.
이에 대하여 김옥균은 《제반사태는 부득불 한차례의 사변을 일으켜 정치개혁을 수행한 연후에야 국가가 민생을 구할수 있고 나라를 보존할수 있게 되였다.
여기에 있어서 첫째가는것은 독립국가로 만드는것이다. 독립하자면 정치외교를 불가불 자수자강하여야 한다.》
물론 《자수자강》, 《부국강병》의 주장에는 나라의 근대적개혁을 요구하는 반봉건적사상도 반영되여 있으나 외세의 침략과 수구파일당의 외세의존정책을 끝장내고 자체의 힘으로 국력을 키워 나라의 독립을 고수하는데 그 목적을 둔것으로서 반침략애국사상의 중요한 표현으로 된다.
김옥균의 반침략애국사상은 또한 우리 나라에 대한 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책동을 폭로하고 그를 저지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할것을 주장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지금 천하의 대세를 살펴보건대 멀리로는 서방제국의 동방정책이 호시탐탐한 눈으로 서로 엿보는 형편인바 우선 나뽈레옹1세이래로 동방침략에 눈길을 돌린 프랑스는 나뽈레옹3세에 벌써 안남교지에 세력을 부식하고 이제 다시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켰는지라…프랑스가 청나라를 굴복시킨 다음에는 그 발길이 장차 우리 조선까지 미치게 될것은 지난 병인년의 전례를 보더라도 다시 의심할 여지가 없을것이오니 그리한다면 목하피페한 국력으로써 장차 어찌 수응할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로씨야의 극동진출이 날로 절박한 형편에 있으니 이는 장차 어떠한 술책으로 방비하리오, 가까이로는 …청일전쟁이 멀지 않은것을 짐작할수 있는바 그때에 우리 조선땅은 전쟁터로 되고말것이니 이는 장차 어찌하리오, 주위형편이 이러하니 부질없이 편안히 있을 때가 아니오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가 당시 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책동을 비교적 정확히 간파하였다는것을 보여준다.
이에 대처하여 그는 정치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며 선진문명을 널리 받아들일데 대한 대책적의견을 제기하였다.
김옥균의 반침략애국사상은 또한 봉건통치배들의 사대주의적정책을 비판하고 나라의 자연부원을 적극 보호하며 민족부흥을 목적으로 문명개화를 적극 주장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사대주의는 오랜 력사적근원을 가지고있다.
특히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으며 말기에 이르러서는 절정에 달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는 자본주의렬강들의 각축전장으로 되였으며 망국의 비운이 시시각각 무겁게 드리웠다.
이러한 환경에서 김옥균은 봉건통치배들의 사대투항주의적정책을 신랄히 비판하고 나라의 독립을 고수할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차서 청나라정부와 결탁하여 권세를 롱락하는 등 국가에 한심한 일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하면서《오늘의 조선에서 영국의 이름을 아는자가 몇사람이나 되는가 조정의 신하들중 영국이 어느곳에 있는가 물으면 막연하여 대답하지 못하는자가 거의 전부이니 이를 비유하여 말하면 어떤것이 와서 나의 몸을 물어도 그 고통을 모를뿐아니라 무엇이 나를 무는지도 모르는것과 같으니 그들과 국가의 존망을 론하는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꿈이야기를 하는것과 같다.》고 하면서 봉건통치배들의 사대주의적립장을 비판하였다. 당시 봉건통치배들의 사대주의가 얼마나 심했는가 하는것은 1882년 임오군인폭동 당시 청나라가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을 랍치하여 1년이상이나 연금하는 무례한 행동을 하였을 때에도 항의 한마디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죄하는 립장에서 조공허례의 형식으로 공물을 바친데서 잘 알수 있다.
김옥균은 이러한 현상에 끝없는 분노를 표시하면서 1884년 갑신정변이후 발표한 《신정강》에서 《대원군을 근일내로 환국시킬것》, 《조공허례의 행사를 페지할것》등을 명기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명실공히 나라의 독립을 고수하려는 그의 반침략애국사상의 반영이였다.
김옥균은 자본주의렬강들의 경제적략탈로부터 나라의 자연부원을 보호할데 대하여서도 적극 주장하였다.
당시 우리 나라에 대한 자본주의렬강들의 침략은 정치, 군사적면에서뿐아니라 경제적측면에서도 강화되였다.
그리하여 많은 자연부원과 경제적리권이 외세의 수중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건통치배들은 이를 묵인, 비호, 조장하였으며 오히려 이에 항의하는 인민들을 탄압하였다.
김옥균은 봉건통치배들의 이러한 행위에 치솟는 민족적격분을 표시하면서 나라의 자연부원을 적극 보호할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는 《우리 나라의 인구가 2천만이 넘고 물산과 같은것은 우수하고 정밀한것은 없다하더라도 자연부원에서는 일본이나 중국의 북부에 비하여 저으기 우세한것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중요광물매장량은 수없이 많으니 이와 같은 풍부한 자원을 타국에 넘겨주자고 하는것은 참으로 원통함을 금할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근대문명에서 뒤떨어졌던 당시의 나라형편에서도 비관하지 않고 조선사람도 결심하고 달라붙으면 능히 자체의 힘으로 문명개화를 이룩할수 있다고 하면서 문명개화에 떨쳐나설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은 그가 《문명개화는 서양사람들만이 할수 있는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의 왕과 신하들도 시기를 살피고 정세를 헤아려 신중하게 연구하며 계획이 선후에 행동하고 시기가 이른 뒤에 실천하며 그릇된 리론에 흔들리지 않고 외국인들의 속임수 빠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역시 화륜선을 배로, 철도를 수레로 삼을수 있으며 지방에는 전선을, 거리에는 가스등을 개설할수 있고 부하고 싶으면 부하고 강하고 싶으면 강할수 있으며 이로부터 나아가서는 다른 나라와 첫자리를 경쟁할수 있을것이며 자기 나라를 지킬수 있을것이다.》고 한데서 잘 알수 있다.
김옥균의 반침략애국사상은 또한 국방력강화를 목적으로 군사제도개혁을 위해 적극 노력한데서 찾아볼수 있다.
그는 1881년 봄 신식군대로서의 별기군을 창설하였고 1883년 봄에는 1 000여명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근대적인 군사훈련을 주었으며 열병식까지 진행하였다. 그는 군대복무에서 신분적특권과 부귀빈천의 차이를 가리지 않고 의무적으로 복무하는 징병제를 내올것을 주장하였으며 개화파계렬의 핵심적인 청년들을 사관학교에 파견하였다.
이와 함께 군사체계를 개혁하여 4영을 1영으로 통합하고 근대적무력건설을 위해 정예병을 선발하여 근위부대를 설치할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이러한 노력과 주장은 국방력을 강화하여 외래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반침략애국사상의 발현이였다.
김옥균의 반침략애국사상은 당시 사람들의 민족적각성을 높이고 그들을 반침략애국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데 긍정적작용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침략애국사상은 적지 않은 제한성을 내포하고있다.
제한성은 우선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고수하는데서 인민대중의 역할을 보지 못한것이다. 인민대중은 민족의 기본성원이며 우리 인민은 력사적으로 외래침략자들의 침략에 맞서 나라와 민족의 자주권을 지켜 굴함없이 싸워온 용감하고 애국심이 높은 인민이다.
그런것만큼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의 독립을 고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인민대중에게 의거하여 그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켜야 할것이였다.
하지만 김옥균은 얼마 안되는 개화세력에 의거하여 정변의 방법으로 정권을 쥐고 근대화를 하면 《부국강병》이 스스로 이루어질것으로 예견하였다.
제한성은 또한 외세의 침략적본질을 옳게 꿰뚫어보지 못하고 일정한 환상을 가지고있은것이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은 청나라의 간섭을 예견하였으며 적아간의 력량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을 리용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 나라를 저들의 지배밑에 두려는 청나라와 일본의 모순을 리용하려고 한것으로서 어느 정도 피할수 없는 전술이라고 볼수 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 나라의 실권을 쥐고있던 수구파일당이 청나라에 대하여 사대주의를 하고있던 조건에서 개화파를 리용하여 우리 나라에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는 교활한 목적으로 개화파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였지 실지 우리 나라의 근대적개혁을 바란것은 아니였다. 이로부터 일본은 겉으로는 지지를 약속하고 실제로는 개화파의 활동을 각방으로 방해하였으며 마지막에는 꺼리낌없이 배신하였다,
김옥균은 일본의 방해책동에서 응당 그 본심을 똑똑히 알고 자체의 력량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에 주목하여야 하겠으나 청일사이의 모순일면만을 과대평가하고 마지막까지 일본에 기대를 건 탓으로 실패를 면할수 없게 되였다.
이와 같은 제한성은 김옥균의 반침략애국사상이 불철저하다는것을 보여주며 이러한 불철저성은 시대적제한성과 함께 그의 계급적제한성의 필연적귀결이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의 반침략애국사상은 봉건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신흥부르죠아지들의 요구와 리해관계를 반영한 부르죠아적애국주의였다고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