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세계화포력사에 특기할 비격진천뢰

 2020.7.2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는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있으며 우리 나라에는 우리 민족의 슬기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이 많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1권 252페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뛰여난 슬기와 재능으로 세상에 자랑할만 한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창조하였다. 그러한 문화유산들가운데는 세계화포력사에 특기할 비격진천뢰도 있다.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는 임진조국전쟁(1592-1598)의 첫해에 만들기 시작하여 전시에 많이 사용한 신관장치가 되여있는 시한포탄이였다.

비격진천뢰는 발사되면 폭발소리가 우뢰소리같고 하늘땅을 뒤흔들어놓으므로 《천지를 진감하는 벼락》 즉 《진천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비격진천뢰는 이전시기부터 써오던 화뢰포나 지뢰포, 충천뢰 등을 발전시킨것으로서 16세기의 화포제조기술자 리장손에 의하여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무쇠로 주조된 비격진천뢰는 공모양을 이루고있었는데 거기에 두개의 불심지구멍이 나있었다. 내부에는 폭발장약과 파편의 역할을 하는 마름쇠들이 가득 채워져있었고 신관장치가 있었다.

비격진천뢰는 크기에 따라 세가지 형태로 구분되였다. 즉 비격진천뢰에는 외경이 330mm이면서 질량이 71.62㎏인 별대비격진천뢰, 외경이 246mm이면서 질량이 39.39㎏인 대비격진천뢰, 외경이 190mm이면서 질량이 17.90㎏인 중비격진천뢰가 있었다.

이것들은 별대완구, 대완구, 중완구 같은 화포에 의하여 발사되였으며 사격거리는 750~900m정도였다.

비격진천뢰에서 특색있는것은 신관장치였다. 이 장치는 나사처럼 홈을 판 나무에 불심지를 감고 그것을 참대통안에 넣어 한쪽끝을 폭발장약에 묻게 되여있었다. 나무나사에 불심지를 10번 감은것은 《속》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쓰면 비격진천뢰가 떨어진 다음 비교적 빨리 폭발하게 되며 15번 감은것은 《지》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쓰면 그것이 더디게 폭발하였다. 따라서 비격진천뢰는 신관으로 폭발시간을 조절할수 있었다.

비격진천뢰는 신관장치를 한 포탄, 시한탄의 첫 형태로서 그 독특한 신관장치는 16세기에 세계적으로 특기할만 한 기술적발명이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한 연구자는 《이 기구의 가장 교묘한 점은 신관장치이다. 일종의 나사형의 나무홈을 파고 거기에 화약심지를 넣고 그 길이에 따라 폭발시간을 규정한것은 이 시대에는 마땅히 경이하지 않을수 없다.》라고 격찬하였다.

이렇듯 비격진천뢰는 기묘한 신관장치를 설치한것으로 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놀랍고 우수한 시한포탄이였다.

이러한 비격진천뢰는 임진조국전쟁시기인 1592년 9월에 일본침략군이 강점한 경주성을 되찾기 위한 야간공성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이때 비격진천뢰의 원리를 모르고있던 일본침략자들은 그것의 폭발로 단꺼번에 수십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그 위력에 혼비백산하여 《귀신의 조화》라고 하면서 성을 버리고 모두 도망쳤다.

이밖에도 비격진천뢰는 1593년 6월 진주성전투 등 여러 전투들에서 사용되여 일본침략자들에게 커다란 공포를 주었다.

이처럼 비격진천뢰는 세계화포력사에 특기할 시한포탄으로서 임진조국전쟁시기 일본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한 우수한 무기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