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조선에서의 농업협동화의 빛나는 승리는 혁명발전, 사회발전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질뿐아니라 사회학리론발전에서도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농업협동화의 빛나는 승리가 사회학리론발전에서 가지는 의의는 사회개조의 시기를 옳게 확정하여야 사회발전을 앞당길수 있다는것과 사회적변혁의 시기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데 있다.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는 전후시기를 농업협동화의 가장 적당한 때로 인정하고 개인농민경리를 협동화할데 대한 방침을 내놓았습니다.》 (
사회적변혁은 시기를 옳게 설정하여야 성과적으로 진행될수 있다. 만일 그 시기를 바로 선택하지 못하고 너무 일찍 시작하거나 너무 늦게 시작하면 우여곡절을 겪을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실패를 면치 못하게 된다.
농업협동화의 시기, 사회적변혁의 시기를 어떻게 선택하는가 하는것은 그 실현의 결정적조건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는데 따라 좌우된다.
토지개혁직후와는 달리 전후 조선의 농촌에서는 대부분의 농민들이 이렇게나 저렇게나 힘을 합치지 않고서는 농사를 지을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으며 따라서 농민들자체가 농업협동화를 절실히 요구하였다.
3년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조선의 농촌경리는 형언할수 없을 정도로 혹심하게 파괴되였다. 침략자들의 무차별적인 폭격만행으로 905개소의 저수지와 관개시설, 하천제방이 파괴되고 37만정보의 부침땅이 피해를 입었으며 9만여정보의 부침땅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25만여마리의 부림소가 없어졌으며 수많은 농기구들이 파손되였다. 그리하여 어떤 농민들은 부림소와 농기구는 있어도 로력이 모자라 농사를 제대로 지을수 없었으며 또 어떤 농민들은 땅과 로력은 있어도 부림소와 농기구가 모자라 농사를 제대로 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농민들은 서로 힘을 합치고 협력하지 않고서는 당장 농사를 지을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또한 전후시기 농민들은 개인경리로써는 자기의 생활형편도 개선할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전쟁으로 인하여 살림도구들이 거의나 마사지고 먹을것과 입을것이 모자랐다. 전후 농민들가운데는 빈농민이 40%였고 겨우 먹고 지낼만한 농민이 50%였으며 좀 여유가 있다는 농민은 10%밖에 안되였다. 전쟁시기에 60만호의 살림집이 마사졌으며 38만마리의 돼지가 죽고 9만그루의 과일나무가 못쓰게 되거나 불타버렸다. 전쟁시기에 입은 농산물피해만도 44만 2천여t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주체38(1949)년에 비하여 전후에 알곡생산은 88%로, 솜과 담배생산은 각각 23%로, 과일생산은 72%로, 고치생산은 58%로 감소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 개인농민경리를 그대로 두고서는 농업생산을 빨리 발전시킬수 없는것은 물론 전후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나선 식량문제도 농민들의 생활문제도 풀수 없었다.
이와 같이 전후에 농촌경리앞에 가로놓인 모든 난관을 이겨내기 위한 오직 하나의 길은 개인농민경리의 협동화였으며 농민들자신도 자기들의 어려운 처지로부터 계속 낡은 개인경리의 울타리에서 살수 없다는것을 알고 협동화를 요구하여나서게 되였다.
농업협동화는 농촌에서 착취와 억압의 근원을 종국적으로 청산하는 심각한 사회적변혁인것만큼 치렬한 계급투쟁을 동반하게 된다. 이 준엄한 계급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혁명력량이 튼튼히 준비되여야 하며 반혁명세력에 비한 혁명력량의 압도적우세가 보장되여야 한다.
전후 조선에는 사회주의혁명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계급적력량관계가 조성되였다.
전후시기는 이처럼 계급적력량관계로 보나 농민들의 처지와 사상상태로 보나 농업협동화를 하는데 더없이 적중한 때였다. 만일 이런 때를 놓치고 시간을 늦추어 부농과 중농이 되살아난 다음에 그들을 협동화하려고 한다면 새로운 난관에 봉착할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