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와서와 청기와

 2023.6.5.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나라 력사와 우리 민족의 귀중한 유산과 전통도 잘 알아야 한다.》 (김정일전집》 제49권 158페지)

슬기롭고 지혜로운 우리 민족은 지난날 세상에 자랑할만한 우수한 문화유산들을 수많이 창조하였다.

우리 민족이 창조한 문화유산들가운데는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청기와도 있다.

이 청기와는 조선봉건왕조수립후 기와제조를 맡아보는 관청으로 설립된 와서(瓦署)에서 만들었다.

와서에는 관원으로서 제주(提調) 1명, 별제(別提) 3명을 두었고 구실아치들로서 서원(書員) 2명, 고직(庫直) 1명, 사령(使令) 2명을 두었으며(《증보문헌비고》 권223 직관고 와서) 기와생산자로서 와장(瓦匠) 40명을 두었다.(《경국대전》 권6 공전)

우리 나라에서 기와는 건물들에 쓰이는 고급지붕물막이감으로 오랜 시기에 걸쳐 궁전, 관청, 사원, 주택 등에 널리 리용되였다.

우리 나라의 기와는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무늬 등으로 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특히 고려시기에 와장(瓦匠)들에 의하여 창안된 청기와는 《고려청기와》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였다.

기와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 고려시기에 이룩된 기와생산의 전통과 유산을 이어받으면서 기술적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불교의 쇠퇴로 하여 절간건축은 대폭 줄어들었으나 궁전, 루정, 향교, 서원 등 건축물들이 크게 늘어나게 되였으며 따라서 기와에 대한 수요도 고려시기에 못지 않게 높아졌다. 또한 량반통치계급의 집결처인 한성의 주택건설에도 막대한 량의 기와가 요구되였다.

이로부터 봉건정부는 전문적으로 기와를 생산보장하는 관청으로서 와서를 설치하고 여기에 일정한 직제를 두었으며 기와생산자인 와장을 두었던것이다.

조선봉건왕조전반기에 와서에서 생산한 기와중에 청기와가 이목을 끌었다.

청기와를 생산하는데 비용이 많이 드는것으로 하여 봉건정부에서는 아련와(기와의 일종)로 청기와를 대용하도록 하였지만 불교가 숭상되던 세조통치시기와 부화방탕한 연산군통치시기에 청기와가 많이 생산되여 절간과 궁전건축에 리용되였다. 세조는 수도복판에 원각사라는 큰 절간을 짓는 공사를 벌려놓고 그에 수요되는 8만장이나 되는 방대한 량의 청기와를 생산하게 하였다.(《세조실록》 권38 10년 6월 갑오)

청기와는 그 색도와 모양, 질에 있어서 대단히 훌륭하였다. 그것은 그 제조기술과 관련되는바 1430년대의 기록에는 《청기와는 염초로 만든다.》고 하였고(《세종실록》 권81 20년 4월 무진) 1460년대의 기록에는 《청기와생산에 필요한 연철을 금성현에서 채취하여 바쳤다.》고 하였으며(《예종실록》 권1 즉위년 9월 정묘) 또한 16세기초에는 함경도 《단천에서 바친 연 6 900근에서 은을 제련해낸 찌기로 청기와를 만들게 하였다.》고 하였다.(《연산군일기》 권63 12년 8월 경술)

이처럼 청기와는 기와를 만드는 주원료인 찰흙과 함께 염초 및 연 또는 연찌기(연슬라크) 등을 배합하여 만들었다.

찰흙은 크기가 0.01㎜이하의 점토질알갱이로서 알갱이가 작을수록 점토의 갖풀질을 이루는 산화철과 산화알루미니움이 들어있는 량이 늘어나 팽창성과 수축성이 적어지면서 균렬이 적어진다. 그러므로 청기와생산에서는 될수록 보드라운 찰흙을 써서 기와가 갈라지는것을 막았다. 염초는 현대의 질산칼리움을 말하는데 녹음점이 330℃밖에 안되여 화합물의 녹음점을 낮추는 작용을 할뿐 아니라 흡수성이 적어 녹은 화합물이 골고루 융합되게 함으로써 기와의 겉면을 고르롭고 매끈하게 하였다.

연 또는 연찌기는 청기와의 색갈을 내는 원료로 리용되였는데 그것은 연 또는 연찌기에 연과 아연이 적지 않게 포함되여있기때문이였다.

원래 연은 푸르스럼한 흰색의 무겁고 무른 금속으로서 그 녹음점이 327~400℃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카리와 철산화물 등이 들어있는 고령토와 연가루를 물에 풀어 만든 유약을 성형한 기와몸체에 발라 1 000~1 150℃의 높은 온도에서 소성하면 청기와의 푸른 색갈이 나오게 된다.

바로 이러한 제조기술을 받아들이여 당시 조선봉건왕조의 기와를 만드는 관청인 와서에서 청기와를 만들었던것이다.

청기와를 직접 만들어낸 기술자, 장공인들은 근로인민대중이였지만 그들이 생산한 청기와는 봉건왕을 비롯한 봉건통치배들의 궁전과 관청건물, 호화주택건설에 리용되였고 근로인민대중의 향유물로는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청기와에는 조선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는것으로 하여 민족의 자랑으로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