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는 오산을 낳고 오산은 비극을 낳는 법이다.
위대한 수령의 령도를 받는 조선의 군대와 인민에 대한 극도의 무지로 하여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미국은 전투에서도, 작전에서도, 전쟁에서도 늘쌍 비극의 주인공이 되군 하였다.
위대한
《우리 인민은 조국해방전쟁에서 위대한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미제의 코대를 꺾어 놓고 그 〈강대성〉에 대한 신화를 산산이 깨뜨려 버렸으며 미제국주의자들이 내리막길에 들어 서는 시초를 열어 놓았습니다.》 (《
우리 인민군대가 공화국에 침입한 적들의 공격을 좌절시키고 즉시 전 전선에 걸쳐 결정적인 반공격으로 넘어갔을 때 있은 일이다.
현대적인 미국제무기로 무장된 리승만괴뢰군으로만도 얼마든지 조선을 먹을수 있으리라고 타산했던 미제는 전쟁개시 3일만에 우리 인민군대의 반공격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그래서 급기야 일본에 있던 미제24사단을 전선에 투입하였으며 선견대를 론산계선에 진출시켰다.
이 선견대는 미24사 21련대 1대대와 52야포대대로 구성되였는데 보병대대장의 이름을 붙여 《스미스특공대》 또는 《스미스지대》라고 불렀다.
자기 힘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빠져 허장성세하면서 우리 인민군대를 정규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토착군대》, 《농민군》이라고 과소평가하던 미제는 이 전쟁을 유람식전쟁정도로 오산하고있었다. 그래서 맥아더는 미군이 전선에 나타났다는것을 알게 되면 인민군지휘관들이 《간담이 서늘》해져서 잘못된 전투지휘를 할것이라고 뇌까렸으며 스미스는 조선군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꼬리를 사리고 도망칠것이다.》고 줴쳤다.
사실 《스미스특공대》는 명색상 미24사단의 선견대였지만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미제침략군의 전투력을 대변하고있었다. 약 1 000명의 병력에 화력은 인민군대의 한개 련대이상이였고 특공대원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참가자들로서 전투경험을 가지고있었다.
《스미스특공대》는 7월 5일 3시 오산 북쪽의 고지들에 진을 치고 남진하는 인민군대를 기다렸다.
과연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군, 그것도 《상승사단》으로 알려진 미24사단 선견대와의 대결에서 인민군대는 어떻게 응수하며 싸움의 운명은 어떻게 락착될것인가. 사람들의 이목은 여기 오산에로 쏠리였다.
미제침략군 선견대를 맞다드는 즉시로 쳐갈길수 있게 만단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계속 공격속도를 높일데 대한 위대한
7월 5일 8시 16분 미24사 포병사령관 파스준장은 《이때가 미국이 2차대전후 처음으로 전쟁에 참가하는 력사적순간으로 될것이다. 본관은 정확한 시간을 기록해두고싶다.》고 떠벌이며 야포대대에 사격명령을 내리였다.
이리하여 그 시각으로부터 미지상부대들은 조선에서 《선전포고없는 전쟁》을 개시했으며 피에 얼룩진 110여차의 해외침략사에서 또 한차례의 《력사적순간》을 기록하게 되였다.
다만 그것이 승리로가 아니라 패배로 기록되였다는 점에서 《순간》의 의미는 달랐다. 《상승》을 자랑하는 미국의 력사에서 처음으로 패전을 기록한 치욕의 력사가 바로 여기 조선의 오산땅에서 막을 연것이였다.
52야포대대장 페리중좌는 105mm포의 일제사격을 명령하고 스미스도 자기 대대의 모든 포들에 사격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인민군땅크부대는 끄떡하지 않고 전진을 계속하였으며 제30땅크련대 땅크병들은 후방의 야포대대를 소멸하기 위하여 계속 전진함으로써 《스미스지대》보병들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뒤이어 진출한 제18보병련대 전투원들은 고립된 적을 단숨에 포위소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어떤 전투원들은 수류탄으로 적 40여명을 요정냈으며 한 공화국영웅은 혼자서 적병 17명이나 총창으로 찔러눕혔다.
결국 맥아더와 미국이 커다란 기대를 걸고있던 미24사단의 선견대는 제대로 싸워도 보지 못하고 괴멸되였다.
미국종군기자는 오산전투를 《오산의 비극》, 《패전의 서전》이라고 썼으며 일본의 한 출판물은 《조선전쟁에서의 미군의 첫 싸움은 참패로 기록되였다.》라고 썼다. 다른 한 출판물은 《조선군은 미군이 예견하고있던 <동양의 토비>도 아니고 <미군의 모습을 보기만 하면 도망치는 공비>도 아니였다.》고 썼다.
이렇게 조선인민군과 미제침략군의 첫 격전은 조선인민군의 승리로, 미제침략군의 패배로 끝나게 되였다.
당황망조한 미24사 사단장 띤은 《스미스특공대》의 괴멸에 대하여 《이것은 대아메리카합중국의 명예에 관한것이며 수치이다.》라고 비명을 질렀다.
오산전투에서 첫 참패를 당한 미제는 조선인민군대의 위력에 대하여 특히 그 지휘능력의 우수성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뉴욕 헤랄드 트리뷴》지 특파원은 《지금에 와서 미국인이 적의 능력을 완전히 과소평가하고있었다는것이 이미 명백해졌다. 2일간에 걸쳐 진행된 전투에서 … 조선군은 그 훈련이 우수하였다는것, 전화밑에서도 훌륭한 규률을 유지하고있었다는것, 우수한 지휘관이 지휘를 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주고있었다.》고 론평하였다.
맥아더는 7월 7일 미합동참모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적은 공세적이며 잘 훈련된 직업적군대이고 군최고수뇌도 우수한 지휘를 할줄 알며 전략전술의 원칙도 잘 리용하고있다.》고 고백하였다.
오산전투가 끝난 다음 미제침략군 패잔병들의 수치스러운 몰골을 보여주는 하나의 웃음거리가 생겨났다.
우리 인민군전투원들이 전장을 수색하며 어느 한 절간에 갔을 때였다. 절간은 인기척 하나없이 고요한데 두명의 중이 불상앞에 무릎을 끓고앉아 불공을 드리고있었다. 그런데 중옷차림에 신발만은 미국제군화를 신은것이 아무래도 수상하여 푹 숙인 낯짝을 살펴보니 파랗고 노란 눈알이 겁에 질려 쉴새없이 데굴거리고있는 미국놈이였다.
병사들이 서리발총창을 가짜중들의 가슴에 들이대자 두놈의 미국놈은 발밑에 어푸러지며 살려달라고 두손을 싹싹 비비였다. 알고보니 이곳으로 도망쳐온 미국놈들은 절간에 있던 두중을 칼로 찔러죽이고 그들의 옷을 벗겨내여 입었던것이다. 인민군대의 수색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놈들은 급히 옷은 갈아입었지만 군화만은 미처 바꾸어신지 못했다.
미군이 살아남기 위하여 절간의 중으로 되였다. 결국 미군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희비극의 주인공이 되였다.
항일혁명전쟁시기 주체24(1935)년 12월 관지부근에서의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제침략군의 장교놈이 너무도 혼쭐이 나서 관속에 송장대신 들어가있었다. 그래서 《대일본제국이 관속에 들어갔다.》는 비화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살아남기 위하여 미제침략군이 절간의 중으로 되였던것이다.
미군이 절간의 중으로 되였다는 이야기는 순식간에 전전선에 퍼져 인민군전투원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다.
미련한 짐승도 한번 빠진 함정에는 다시 빠지지 않는다지만 미국은 《오산의 비극》을 망각한 탓에 전쟁기간 미제침략군 40만 5 498명을 포함하여 156만 7 128명이 살상, 포로당하고 1만 2 224대의 비행기와 564척의 각종 함선, 3 255대의 땅크 및 장갑차, 1만 3 350여대의 자동차, 7 695문의 각종 포를 비롯한 막대한 량의 전투기술기재들과 군수물자를 잃는 참패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늘도 미제는 조선전쟁의 교훈을 망각하고 이 땅우에 또다시 전쟁의 불을 지르려고 미쳐날뛰고있다.
우리 군대와 인민은 미제와의 총결산에서 항복서에 도장을 찍을 놈도 없게 죽탕쳐버릴것이며 미제가 아직까지 맛보지 못한 무서운 공포와 전률, 쓰디쓴 참패를 우리와의 전쟁을 통하여 저들의 땅덩어리에서 맛보게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