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숭령전과 숭인전이 원상대로 보존되게 된 사연

 2020.10.14.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민족유산을 주체적립장에서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정책을 제시하시고 력사에 묻혀있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새롭게 발굴고증하며 외래침략자들에 의하여 파괴된 유적들을 원상대로 복구개건하도록 이끄시여 선조들이 창조한 문화유산을 민족의 재보로 인민들과 후대들에게 안겨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리 선조들의 슬기와 재능이 깃든 력사유적들을 원상복구하여 민족의 재보로 후손만대에 길이 빛내여주신 민족의 어버이이시였다.

혁명의 수도 한복판에 웅장화려하게 솟아있는 주체예술의 전당 만수대예술극장과 청소년학생들의 과외교양의 종합적인 전당으로 우뚝 솟은 평양학생소년궁전사이에는 숭령전과 숭인전이라고 불리우는 건물이 나란히 서있어 현대적인 거리에 민족적정서를 불러일으키고있다.

바로 옛 건물들인 숭령전과 숭인전이 나란히 자리잡게 된데는 어버이수령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주체50(1961)년 10월 어느날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날 건설이 마감단계에 이른 평양학생소년궁전건설장에 나오시였다.

만면에 기쁨이 넘친 미소를 띄우시고 건설중에 있는 평양학생소년궁전을 돌아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건물옆에 자리잡고있는 숭령전에 시선을 멈추시였다.

평양학생소년궁전옆에 있는 숭령전으로 말하면 우리 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을 세운 단군과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세운 사당이였다. 숭령전을 처음 세운것은 1429년이다. 처음에는 단군을 제사지내던 사당집이였는데 후에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세종실록》에는 1429년에 단군사당을 세우고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하였다고 씌여있다. 그전에 흔히 《단군사》, 《단군전》이라고 불러오던것이 단군과 동명왕을 함께 제사지내게 되면서부터 숭령전이라고 부르게 되였다. 현재의 건물은 1714년에 다시 지은것이다. 숭령전은 본래 본정과 동쪽행랑 3간, 서쪽행랑 2간, 대문 3간과 동서좌우에 달린 좁은 문간 1간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시기에 대부분 파괴되고 본정과 대문만 남게 되였다.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적들의 야만적폭격에 의하여 심히 파손된것을 우리 당과 공화국정부에서는 원상대로 복구하도록 하였다.

당시 수행한 일군들은 어린이들의 과외교양의 거점으로 일떠선 학생소년궁전옆에 자그마한 유적건물이 자리잡고있는것은 현대적건물에 어울리지 않을뿐아니라 학생들의 교양에도 좋은 영향을 줄수 없을것이라고 편협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헐어버렸으면 하는 의향을 품고있었다. 그것은 숭인전과 숭령전으로 말하면 봉건통치배들이 자기들의 지배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하여 시조왕들을 신성화하고 인민들의 머리속에 저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사상을 부식시키기 위하여 세운 사당인것만큼 그 옛 건물이 청소년교양에는 좋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있었던것이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렇게 일면적으로만 보지 않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숭령전이 봉건통치배들이 저들의 왕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하여 세운 건물이기는 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뛰여난 건축술과 세련된 기교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우리 나라 건축사연구에 좋은 자료로 될수 있다고 보시였다.

장대재우에서 유적건물을 한동안 굽어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의 속마음을 헤아려보신듯 그들을 둘러보시며 숭령전은 옛 건물로서 구획내에 그대로 두는것이 좋을것 같다고 교시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에 접한 일군들은 그때에야 자기들의 생각이 너무나도 짧았고 편협하였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민족문화유적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깊은 관심은 끝이 없으시였다.

그 언제인가는 평양에는 숭인전이 제일 오랜 건물이라고 하시면서 그 주변을 잘 정리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숭인전은 숭령전과 좀 떨어진 길건너편에 오늘의 만수대예술극장 건물부지안에 자리잡고있었다.

숭인전은 고려말기인 1325년에 처음 세웠으며 1352년과 1428년 그리고 조국해방전쟁직후인 주체43(1954)년에 대보수를 하였다. 숭인전은 본래 중심건물인 정전을 비롯하여 3간량통의 신문(정문), 7간의 재계청, 3간씩의 동, 서 행랑, 동, 서 협문, 대문, 소문, 비각 등 10여채의 건물들로 이루어져있었으나 임진조국전쟁과 조국해방전쟁시기 침략자들에게 피해를 입어 정전과 대문, 비각만 남아있었다.

주체65(1976)년 주체예술의 전당 만수대예술극장을 건설할 때였다.

만수대예술극장으로 말하면 그 규모에 있어서나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이름있다고 하는 모든 극장들보다 비할바없이 웅장화려하 고 현대적으로 건설되는 세계적인 대기념비적건물이였다.

당시 만수대예술극장이 방대한 면적의 부지를 차지하고 웅장하게 일떠서는것으로 하여 이 부지안에 들어있는 모든 건물들을 정리하면서 만수대예술극장옆에 있는 숭인전도 헐기로 하였다.

거듭되는 제의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 일군을 현지에 파견하시여 실태를 구체적으로 료해하도록 하시였으며 그후 오랜 력사유적인 숭인전을 없애지 맡고 숭령전곁에 원상그대로 옮겨지어 보존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리하여 숭인전건물이 숭령전건물구역에 옮겨져 오늘처럼 나란히 보존되게 되였던것이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은정과 배려속에 숭인전과 숭령전은 수도 한복판에 웅장화려하게 일떠서있는 만수대예술극장 가까이에 나란히 서서 자기의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있는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