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조들은 그림을 아주 잘 그렸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가운데는 걸작이 많습니다.》 (
우리 나라 력사에서 김홍도라고 하면 18세기 후반기에 그림을 잘 그린 화가로 널리 알려져있다.
그는 이 시기에 회화의 주제내용과 형상기법에서 새로운 경지를 열어놓아 민족회화발전에서 적지 않는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실주의회화발전에서 큰 역할을 한 김홍도가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시기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있으나 그 이후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나 알려져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김홍도의 후기의 활동에 대하여 새롭게 밝히려고 한다.
김홍도는 1745년에 수도 한성에서 출생하였는데 자는 사능(士能), 호는 단원(檀園), 단구(亶邱), 서호(西湖), 고면거사(高眠居士) 등 여러가지로 불리웠으며 도화서 화원으로 있다가 충청도 연풍현감까지 지냈다.
그는 사회계급적모순이 그 어느때보다 격화되고있던 18세기 후반기에 창작활동을 진행하였다.
김홍도가 18세기 후반기에 회화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수 있은것은 그가 뛰여난 회화적재능을 지닌데도 있었지만 전시기 윤두서, 조영석, 김두량, 변상벽 등 선배화가들의 사실주의적인 그림들에서 진보적인 화풍을 새롭게 받아들이면서 《사생》(寫生)적인 창작태도를 가진것과 중요하게 관련되여있었다.
* 《사생》이란 회화에서 실물을 직접 보고 그대로 본따 그리는것을 의미한다.
옛 화가들의 생존년대와 창작활동을 종합한 《근역서화징》에 기록된 김홍도의 창작활동과정을 보면 그는 1773년(영조49년)에 선배화가인 변상벽과 함께 영조의 화상과 정조의 왕세자시절의 화상을 그려준것으로 하여 화가로서는 받을수 없는 《사포서》(정6품관청으로서 왕궁후원의 포전을 가꾸고 채소를 제공하는 일을 맡은 관청)의 감목관벼슬을 받았다가 1791년(정조15년)부터 1795년까지 연풍현감을 지낸것으로 되여있다.
여기서 문제로 제기되는것은 《근역서화징》에는 대다수 도화서화가들의 생존년대가 기록되여있는데 정직벼슬까지 받은 김홍도의 생존년대가 기록되여있지 않는것과 영조-정조시기에 활동한 김홍도가 영조년간에만 활동한 자료만 있는것은 많은 의문점을 던져주고있다.
그러면 1795년이후 김홍도의 활동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는가 하는것이다.
그것은 우선 당시 봉건정부안에서 벌어지던 당파싸움으로 하여 김홍도의 운명이 위태롭게 된것과 관련하여 그의 행적을 기록할수 없게 된것과 관련되였다고 볼수 있다.
1776년 3월에 정조가 즉위할 당시의 봉건정부안에서는 시파와 벽파로 갈라져 서로 반목질시하는 당파싸움이 벌어지고있었다. 정조가 등요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은 남인계렬(시파)의 채제공을 비롯하여 실학의 대표적인물인 정약용과 북학파계렬의 박제가, 류득공, 리덕무 등이였다. 당시 김홍도는 봉건정부안에서 실권을 잡고있던 시파들과 가깝게 지내고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였다.
그런데 1791년에 시파는 벽파의 공격을 받는 《신해박해》를 당하게 되였다.
* 《신해박해》의 직접적동기는 카톨릭교문제와 관련되여있었다. 전라도 전주에 살고있던 윤지충은 량반으로서 카톨릭교를 신봉하던 인물이였는데 어머니가 죽자 장례식을 카톨릭교식에 따라 제상을 차렸다. 이 일로 하여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고 시파이며 카톨릭교신자였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여나섬으로써 이 문제는 정치적문제로 번져져 결국 이들은 사형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봉건정부안에서 대세는 벽파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하였고 17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조선에 대한 밀입국사건으로 정약용을 비롯한 나머지 사파들도 탄압을 당하거나 류배를 당하게 되였다.
김홍도는 시파들의 비호를 받은것으로 하여 봉건정부에서 탄핵의 대상으로 되였다.
이러한 사실은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당파싸움의 희생물이 되면서 김홍도의 운명도 정약용과 다를바없었기때문에 력사기록에서 루락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점을 강하게 던져주고있다.
그것은 또한 조선봉건왕조가 김홍도를 일본의 정치정세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사업에 인입시킨것과 관련되였다고도 볼수 있다.
이 시기 일본은 임진조국전쟁에서 참패를 당하고 교훈을 찾을 대신 우리 나라를 다시 침략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있었다.
조선봉건왕조는 17세기 중엽이후부터 대일정책을 변경하였는데 그 직접적동기는 1635년에 일어난 야나가와사건이였다. 이 사건은 대마도(쯔시마)측이 조선봉건왕조와 일본막부정부사이에 오고간 국서들을 위조, 혹은 개작한것으로 하여 벌어진 사건이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과 일본사이에는 오래동안 외교적인 마찰을 가져오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김홍도는 1789년에 정조의 어명을 받고 조선침략의 본거지인 대마도의 실태를 알아내기 위하여 스승인 김응환(화가)과 함께 이 섬에 파견되였다.
그런데 함께 동행하던 김응환이 부산에서 급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김홍도는 단신으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끝내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왔다.
봉건정부는 이처럼 김홍도를 은밀히 대마도에 파견하여 일본의 조선에 대한 침략행위를 사전에 알아내려고 하였다.
이 사업은 매우 비밀리에 진행되여야 하는것만큼 김홍도의 행적에 대해서는 봉건정부안에서도 몇사람 제외하고는 모두 극비에 붙여졌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현재 일본교또박물관에 전시되여있는 《선옹도》(115×50㎝)는 김홍도가 그린 작품의 하나이다.
이 그림은 칡넝쿨이 엉켜져 뻗어올라간 큰 늙은 소나무에 매가 앉아있는 모습을 형상한것인데 여기에서 주목되는것은 이 작품에 《조선국 사능씨 김주사》라고 쓴 락관이 명백히 새겨져있다.
중세기 우리 나라 화가들이 외국에 나가서 그린 그림에는 조선이라는 국적을 반드시 새겼는데 만약 김홍도가 일본에 가서 이 그림을 그린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조선국》이라는 락관을 하지 않았을것이다.
또한 《사능씨》란 김홍도의 자의 하나이며 《김주사》는 김홍도가 섬세하게 묘사하였다는 뜻이다.
1795년 이후시기에 김홍도가 창작한 그림들가운데는 인물주제화가 거의나 없고 대체로 풍경화가 대다수를 차지하고있는데 그것은 필치와 높은 기교로 폭포의 힘찬 물줄기를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구룡폭》과 《숲속의 달밤》, 《파도》 등과 《표범가죽》, 《개》, 《늙은 사자》 등 은 김홍도가 자기를 드러내지 않기 위하여 이러한 그림들을 그리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고있다.
김홍도의 후기의 활동은 이처럼 여러가지 요인에 의하여 력사에 정확히 기록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