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춘추동지(1912. 3. 8-1988. 4. 27)는 항일혁명투사이며 당 및 국가활동가였다.
주체19(1930)년부터 혁명의 길에 나선 그는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군의사업을 맡아보았으며 1930년대후반기에는 조선인민혁명군 독립려단당위원회 비서, 7련대, 8련대 비서, 동만당공작위원회 비서, 《3.1월간》명예기자로 활동하였고 해방후에는 강원도위원회 위원장으로 사업하였다. 주체46(1957)년 4월부터 알바니아, 벌가리아주재 대사로 사업하였으며 그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사업을 거쳐 공화국 부
림춘추동지는 중국 연길현의 가난한 조선농민의 집에서 태여났다.
어떻게 하나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부모의 노력으로 그는 서당과 소학교를 거쳐 중학까지 다니다가 중퇴하였으나 꾸준한 자습으로 의술까지 소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지식을 밥줄이나 건사하는데 쓰지 않았다.
그는 수령앞에, 혁명앞에 다진 맹세, 혁명가의 의리를 지켰으며 혁명의 요구에 자기의 모든 지식과 열정을 아낌없이 바치였다.
그는 한생 희생된 전우들의 부탁대로 수령의 력사를 심장으로 한자한자 써나갔으며 수령의 후계자에게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붓대로 충정다하였다.
《나는 우리의 간부들과 당원들이 림춘추의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의리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림춘추는 당과 수령에 대한 의리를 높은 경지에서 구현한 투사였다.》 (
그러면 과연 무엇이 림춘추동지가 혁명적의리에 충실한 빨찌산문필가로 한생을 살수 있게 하였는가.
주체19(1930)년 연길현 조양천에서 림춘추동지는
이날 수첩에 《나의 비망록》이라는 제목으로
림춘추동지가 진짜배기 유격대문필가로 성장할수 있은것은
조국광복회기관지인 《3.1월간》명예기자로서 문필활동을 본격적으로 벌릴데 대한 가르치심을 주시고 필기도구까지 안겨주신
그는 《쇠소리 쟁쟁나는 원고를 더 빨리!》라는 신조를 가슴깊이 새기고 《만신창이 된 일본경제》를 비롯한 무게있는 글들을 척척 써냈으며
이 배낭은 그후
림춘추동지는 항일무장투쟁시기뿐만아니라 해방후에도 빨찌산종군기자의 사명을 잊지 않았으며 첫 도당기관지 《선봉》을
림춘추동지는 숭고하고 진실한 항일유격대식의리란 어떤것인가를 수령의 후계자에게 붓대로 무한히 충정다하는것으로 새 세대들에게 보여주었다.
림춘추동지는 종파의 해독성을 혁명투쟁초시기부터 누구보다 뼈저리게 체험하였다.
하기에 그는 1970년대 초엽
그는 사업상 용무로 도, 시, 군에 출장을 내려갈 때마다 《영명한 지도자
또한 항일투사들과 함께
림춘추동지는
림춘추동지는 주체47(1958)년 봄
림춘추동지가 공화국창건 30돐을 맞으며 올린 종합회상실기 《붉은 해발아래 항일혁명 20년》(1~5)을 보신
림춘추동지는 그날 책을 쓰다듬으며 흐느끼였다. 무한한 행복감에 눈물을 흘렸고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신
자신을 림춘추동지의 젊은 동지라고 하시며 믿음과 정을 다해주시는
생을 마감지으면서 림춘추동지는 수령에게 충실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뜻깊은 유언을 남기였다.
의리는 은혜와 사랑을 준데 대하여 잊지 않고 그에 보답하는 인간의 미덕이다.
진실한 사랑과 믿음이 변함없는 의리를 낳는 법이다.
림춘추동지가 저절로 그런 진실한 의리의 인간, 펜과 혁명을 하나로 이어놓는 진짜혁명가가 된것이 아니라 평범하던 청년도 의리의 인간, 충정의 인간으로 키워주는 은혜로운 품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림춘추동지는 한생 백두산절세위인들의 위대한 사랑과 믿음, 의리의 세계속에서 살면서 참다운 혁명적의리를 배웠고 그 품에서 충정과 의리의 한생을 보냈다.
백두산출신문필가 림춘추동지의 붓대한생은 이렇게 말해준다.
언제나 의리에 살라고, 붓대로 수령께 충실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