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종합대학 법률대학 오광섭
2019.8.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오로지 인민의 행복을 위한 길에서 한평생을 그 어떤 특혜와 특전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시였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은 우리 인민과 세계 진보적인민들의 다함없는 존경과 흠모를 받으시였지만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특혜와 특전도 허용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하시였다.》
력사적인 최고인민회의 제3기 대의원선거가 진행되던 주체51(1962)년 10월 8일에 있은 일이다.
이날 선거장으로 떠나시기 위해 차에 오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득 한 일군에게 자신의 공민증에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어리둥절하여 못박힌듯 굳어졌다.
우리 인민들뿐아니라 세계 혁명적인민들도 높이 우러러받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공민증을 지참하지 않으신들 그 누가 그이를 알아뵙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한 일군이 위대한 수령님께 선거장에 공민증을 가지고 가지 않으셔도 되지 않겠는가고 말씀드리였다.
그러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에게 자신도 공화국공민인데 나라에서 제정한 법을 자신부터 먼저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고, 자신께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자신을 인민들우에 있는 별다른 존재라고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시간이 좀 지체되더라도 선거장에 공민증을 가지고 가자고 뜨겁게 이르시였다.
돌이켜보면 항일혁명투쟁의 나날에는 사령관도 인민의 아들이라고 하시며 손수 도끼를 드시고 나무도 패주시고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인민들이 조밥을 먹을 때에는 자신께서도 조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시며 인민들과 한치의 간격도 없이 너무도 소박하게 생활해오신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우러르는 일군들의 뇌리에는 문득 그 누군가가 들려주던 하나의 잊지 못할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국이 해방된 이듬해 8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강서군(당시) 청산리에 있는 한 약수터에 들리시였다.
당시 조국해방 1돐을 경축하는 마을에서는 래왕이 많은 이곳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약수터앞에 솔문을 만들어 세우고 그앞에 경비원까지 세워놓고있었다.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잠시 약수터주변을 둘러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경비를 서고있는 농민에게로 다가가시여 수고한다고 다정히 인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을 미처 알아뵙지 못한 그 농민은 그이께 미안하지만 증명서를 좀 보여주실수 없는가고 말씀드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의 증명서말입니까?》라고 하시며 그에게 자신의 증명서를 꺼내 보이시였다. 증명서를 받아들고 들여다보던 농민은 한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빼앗긴 나라를 찾아주시고 자기들에게 땅을 분여해주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의 존귀하신 존함이 새겨져있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무도 죄송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하는 농민의 두손을 따뜻이 잡아주시며 경비를 잘 서고있다고, 이제는 통과해도 되겠는가고 물으신 다음에야 약수터안으로 들어가시였다. …
일군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위대한 수령님의 공민증을 가지러 갔던 한 일군이 돌아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가져온 공민증을 받아드시고 확인하신 다음 그것을 소중히 품안에 넣으시였다.
이날 선거장에 도착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곳 일군들에게 공민증을 정히 보이시고 투표에 참가하시였다.
언제나 자신을 인민의 한 성원으로 여기시고 인민과 꼭같이 생활하시는것을 철칙으로 삼으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정녕 우리 수령님의 혁명생애는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한없이 고결한 인민의 수령의 위대한 한생,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치신 위대한 혁명가, 위대한 평민의 한생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