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상품화페관계는 리조시기에 들어와 봉건정부의 상업억제정책으로 여러가지 장애에 부딪쳤으나 자기 발전의 길을 따라 더욱더 장성하였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60년전인 주체50(1961)년 7월 21일
지난 시기 우리 나라에서 상품화페관계의 발생발전에 대한 문제는 서유럽자본주의나라들의 자료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러다보니 상품생산과 교환의 발전을 목축종족을 기본으로 하여 설명하였고 일반적등가물로서도 양을 실례로 들고있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상품화페관계의 발생발전과정의 합법칙성을 정확히 리해할수 없게 하였다.
이러한 실태를 꿰뚫어보신
원시공동체말기 사람들이 살고있는 자연지리적조건은 서로 달랐으며 이것으로 하여 그들사이에 사회적분업이 발생하였다. 사회적분업은 곧 사람들사이의 교환을 산생시켰다.
함경북도 온성군 강안리 수남유적, 회령시 오동유적, 무산군 범의 구석유적을 비롯하여 두만강중상류의 집자리와 무덤들에서는 명태의 뼈와 밥조개껍질이 나왔으며 황해북도 봉산군 신흥동 집자리유적에서는 《돌돈》이라고 부르는 원판형돌제품이 나왔다. 이것은 생업을 달리하는 사람들사이에 교환이 이루어졌다는것을 말해주고있다.
고대에 교환관계가 발전하였다는것은 고조선의 법인 《범금8조》에 남의 물건을 도적질한자는 그 집의 노예로 만들며 만일 그 죄에서 벗어나려면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고 규정되여있는것을 통하여 알수 있다.
삼국시기 상품화페관계의 발전은 장의 형성에서 찾아볼수 있다.
고구려의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시집와서 자기가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 말을 비롯한 여러가지 물건을 사오도록 한것이라든가, 행상길에 오른 남편을 애타게 그리면서 불렀다는 백제의 가요 《정읍사》는 당시 시장을 통한 상품류통이 활발히 진행되였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이 과정에 고구려에서는 쌀과 천이 일반적등가물로 고착되였을뿐아니라 일부 금속화페도 류통되였다.
고려시기는 우리 나라의 상품화페관계발전에서 특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고려봉건국가의 상업장려정책으로 하여 수도 개성과 평양을 비롯한 일부 도시들에는 관영상업과 민간상업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발전은 장거래상업과 행상, 선상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특히 고려시기는 대외무역을 통하여 우리 나라의 위력과 민족의 슬기를 국제적으로 크게 떨친 시기였다. 고려는 가까이에 있는 이웃나라들과는 물론 멀리 아라비아상인들과도 무역을 하였다. 대외관계가 확대되고 무역이 발전하면서 고려라는 이름이 점차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오늘도 우리 나라를 가리켜 《코레아》라고 부르는것도 여기에서부터 유래된것이였다.
고려시기에는 쌀, 천과 같은 현물화페와 함께 삼한통보, 해동통보, 동국통보 등 여러가지 금속화페가 주조되여 류통되였으며 이 과정에 상품화페관계는 더욱 발전하게 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상품화페관계는 17세기이후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에 기초하여 전례없이 장성하였다. 17세기이후 농업부문에서는 알곡작물의 재배와 함께 담배, 인삼과 같은 공예작물과 남새, 과일생산이 크게 늘어나 상업적농업이 급속히 발전하였고 수공업분야에서도 소상품생산이 확대되여 상품생산적성격이 강화되였으며 이에 따라 상품류통이 활발히 진행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상품생산과 상품류통이 확대되면서 장은 도시의 범위를 벗어나 모든 지방에로 퍼져나갔으며 이에 따라 상업중심지들이 출현하고 국내시장이 더욱 활발해졌다.
상품생산과 상품류통의 빠른 장성은 화페류통의 발전과 밀접히 련관되여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현물화페와 함께 일찍부터 류통되여오던 금속화페는 17세기이후에 《상평통보》가 주조되고 그것이 통일적인 금속화페로 발전하면서 전국적인 범위에서 중단없이 류통되게 되였다.
전국적범위에서의 통일적인 금속화페의 류통은 상품류통의 장성과 함께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를 분해시키고 자본주의적경제관계의 발생발전을 촉진시켰다.
우리 나라에서 귀금속으로 된 근대적주화를 처음으로 주조한것은 1886년이였으나 류통되지는 못하였다. 근대적화페제도를 확립할데 대한 문제는 그후 혁신관료들이 단행한 갑오개혁에도 예견되여있었는데 그것이 《신식화페발행장정》이였다.
《신식화페발행장정》은 은본위제를 선포하고 새로운 주화발행규정을 법적으로 제정한것으로서 일부 미숙한 점은 있으나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화페제도의 기초를 이루게 되였다.
그러나 근대적화페제도는 일본을 비롯한 외래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인 간섭책동에 의하여 자기 발전의 길을 걷지 못하였다.
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