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 이름있는 작가나 작곡가, 화가도 있고 인류문화의 보물고에 기여한 명작도 있다는것을 세상사람들이 알게 하여야 한다. 그래야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안겨줄수 있고 민족문학예술유산을 귀중히 여기고 옳게 계승발전시킬수 있다.》 (
반만년의 우리 민족사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한목숨을 아낌없이 바친 애국적인 녀성들과 뛰여난 창작적재능으로 우수한 작품들을 남긴 재능있는 녀류작가, 녀류화가들의 활동도 전해지고있다.
그가운데는 짧은 생애를 통하여 중세녀류시문학을 새로운 높은 경지에 올려세운 녀인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16세기에 우리 민족이 낳은 재능있는 녀류시인 허란설헌이다.
허란설헌은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량반집의 귀동딸로 태여났다. 그의 본명은 초희, 자는 경번이며 란설헌은 호이다.
그의 집안은 모두가 당대에 문장가로 이름을 떨친 진보적인 문인가문이였다.
허란설헌은 오빠들과 동생들이 배우는 등뒤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나 7살때에는 벌써 시를 지어 형제들과 겨루었고 그림도 잘 그리여 사람들을 경탄시켰으며 산문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어 사람들로부터 《녀신동》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허란설헌은 허균과 함께 당시 유명한 시인이였던 리달에게서 배웠다.
리달은 최경창, 백광훈 등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였다. 리달은 량반가문에서 태여났으나 서자인 탓으로 하여 재능이 있으면서도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으며 이로 하여 봉건사회에 대한 불만을 품고있었다.
허균은 스승인 리달의 이런 불우한 처지를 동정하게 되면서부터 신분관계의 틀에만 매여 재능있는 인재도 천시하는 량반통치배들의 처사에 불만을 품게 되였고 결국에는 적서차별과 봉건통치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을 반영한 소설 《홍길동전》을 쓰게 되였다.
량반가문에서 나서자란 허란설헌이 녀성으로서 사회적문제에 관심을 돌리고 하층인민들의 처지에 깊은 동정을 표시한 작품들을 적지 않게 창작하게 된것도 리달의 영향이 있었기때문이였다.
허란설헌은 스승의 교육과 영향,
그는 김성렵과 결혼하여 두 남매를 낳았으나 다 잃고 설상가상으로 친정집에 이러저러한 사고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통에 마음고생이 많았다. 숨막히는 봉건사회의 도가니속에서 허란설헌은 오로지 마음의 안정을 독서와 창작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는 자기가 겪은 모든 체험을 시로 형상하였다. 그러나 뛰여난 재주와 높은 리상을 가지고 바야흐로 창작의 꿈을 한껏 꽃피우려던 시기에 그는 그 우수한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1589년 봄 27살의 젊은 나이로 일생을 마치였다.
그의 생은 짧았으나 그가 창작한 시원고는 한방에 가득할만큼 많았다고 한다. 허나 림종의 시각에 그는 평생 쓴 원고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자기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작품을 제손으로 태워버린 그 비극적소행은 당시 사회가 녀성들에게 강요한 봉건적질곡에 대한 원망과 항거였다.
다행히도 친정에 남아있던 몇편의 유고를 허균이 간수하고있은것으로 하여 오늘까지 전해지고있다.
허균이 37살 나던 해에 명나라사신 주지번을 접대하는 관리로 임명된적이 있었다.
그는 한성입구에 있는 벽제관에서 사신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글짓기로 즐기군 하였는데 이 과정에 주지번은 허균의 글재주에 탄복하였다.
본국으로 떠나기 며칠전 어느날이였다.
이날 허균은 주지번과 못가를 거닐며 산책하고있었다.
한동안 무슨 생각에 골몰하던 주지번이 허균에게 한가지 청이 있다며 말을 뗐다.
《허선생, 이번에 허선생과 지내며 보니 당신의 글재주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상봉의 기념으로 나에게 몇수 남겨주지 않으시려우?》
허균은 그의 제의를 점잖게 사양하다가 거듭되는 권고에 못이겨 누이의 유고작을 내놓기로 작정했다.
그 시들을 본 주지번은 모두 주옥같은 문구들이라며 감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더구나 이 작품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절명한 한 불우한 녀인의것이라는것을 알고는 못내 아쉬워하였다. 그후 중국으로 돌아간 주지번은 1606년에 그 시들을 묶어 《란설헌집》으로 출판하였다.
17세기의 작가 김만중은 률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이 당대에 서화의 제일인자라면 《규중시인으로서는 허란설헌이 첫째》라고 평가를 아끼지 않았으며 중국의 유명한 작가 조문기는 허란설헌이 7살때에 지은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보고 《이 글을 읽으니 참으로 신선이 되여 백옥루에 올라가는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라고 찬탄하였다.
허란설헌은 시를 잘 지었을뿐 아니라 필체도 훌륭하였다.
아래에 그가 쓴 시 한편의 필체와 내용을 소개한다.
烟銷瑤空鶴未歸
桂花陰裏閉珠扉
溪頭盡日神靈雨
滿地香雲濕不蜚
丁亥暮春 蘭雪軒
안개 어린 하늘우에 두루미떼 안보이고
계수나무 그늘속에 사립문은 닫겼어라
시내가에 해종일 보슬비 내리더니
구름도 젖었는지 땅우에서 날지 않네
정해년 늦은 봄 란설헌
허란설헌의 이 필체는 약간의 초서를 섞어 쓴 행서로서 필획이 연약하면서도 균일한데 아담하고 부드러워 녀성미가 완연하게 드러나보인다.
이처럼 허란설헌은 순탄치 않은 짧은 인생을 살았으나 적지 않은 명시들을 써서 16세기 문화발전에 기여한 이름있는 녀류시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