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의 부벽루

 2023.4.7.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사방으로 앞이 탁 트인 을밀대의 봄경치나 밝은 달이 둥실 떠오를무렵에 펼쳐지는 부벽루의 풍경은 참으로 볼만 합니다.》 (김정일전집》 제4권 333페지)

예로부터 평양은 자연경치가 하도 아름다와 조선팔경의 하나로 불리워오고있다.

평양은 산천경개가 절승일뿐 아니라 동방의 강국이였던 고구려의 도읍지로서 고적들도 많아 오늘도 세상에 그 명성을 떨치고있다.

평양의 명승들중에는 절승경개로 자랑높고 옛 건축물들로 이름높은 모란봉도 있다.

풍치아름다운 모란봉에는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을밀대, 최승대, 칠성문과 함께 청류벽우에 높이 솟은 부벽루가 있다.

부벽루는 지금으로부터 1630년전인 393년에 고구려인민들이 깎아지른듯 솟구친 모란봉의 동쪽 청류벽우에 세워놓은 루정이다.

이 루정을 처음 세울 당시에는 영명사(고구려시기 평양 모란봉에 세운 절)에 부속된 루정이라고 하여 영명루라고 이름지었다.

12세기초에 와서 고려사람들은 영명루가 대동강 푸른 물우에 둥실 떠있는 루정이라는 의미에서 《뜰 부(浮)》, 《푸를 벽(碧)》, 《다락 루(樓)》의 세 문자를 합쳐 《부벽루》(浮碧樓)라고 고쳐불렀다.

천하절승 청류벽우에 자리잡은 부벽루는 마치 구름우에 우뚝 솟아있는 루대와 같고 그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결은 옥구슬이 줄줄이 굴러가는듯하다.

주체26(1937)년 5월 20일 장백현 19도구 지양개의 달밝은 밤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것을 간청하는 조선인민혁명군 대원들에게 평양에는 절승경개로 이름높은 모란봉이 있다고, 모란봉의 청류벽밑으로는 대동강의 맑은 물이 감돌아흐르는데 청류벽우에 자리잡은 부벽루에 오르면 구름을 타고앉은듯한 감을 준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시였다.

모란봉에 솟아오른 부벽루의 경치가 하도 아름다와 이곳에 오른 옛사람들은 저저마다 자기의 감흥을 시에 담아 노래하군 하였다.

고려시기의 유명한 시인이였던 김황원은 12세기말경에 나라의 명루로 소문이 자자한 부벽루를 찾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기묘한 봉우리들과 골짜기들로 이루어진 천험요새가 눈에 어려오고 앞을 바라보면 출렁이는 대동강과 릉라도, 드넓은 벌판과 뭇산들이 한눈에 안겨드는 부벽루의 황홀경!

(황홀하기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비길데 없는 부벽루의 훌륭한 경치를 이런 시구로밖에 노래할수 없다더냐?)

부벽루에 붙어있는 옛 시인들의 시를 바라보며 아쉬운 생각에 갈마든 김황원은 자기의 시적재능을 발휘하여 최상의 걸작을 쓰기로 하였다.

부벽루의 동쪽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점도록 바라보던 김황원의 붓끝에서는 드디여 글줄이 물결치기 시작하였다.

《장성일면 용용수 (長城一面 溶溶水)

대야동두 점점산 (大野東頭 點點山)》

이 시구는 《길게 뻗은 성벽의 한켠엔 강물이 늠실늠실, 아득한 벌판 동쪽켠엔 산봉우리들이 우뚝우뚝》이라는 뜻이다.

이만하면 부벽루의 아름다운 전경에 대해서는 비교적 적중하게 노래하였다고 생각한 김황원은 시의 뒤련에서 부벽루의 절경을 구가하기로 작정하고 루정의 기둥에 몸을 기댄 다음 신통한 시어를 고르느라 모대기기만 하였다.

황혼이 깃들도록 머리를 짜내고 붓방아를 찧었건만 고금의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부벽루의 절묘한 경치를 시구들에 담아내기에는 재능이 너무나 부족하다는것을 깨닫게 된 김황원은 부벽루의 시를 마감짓지 못한채 붓대를 꺾으면서 목놓아 통곡을 하다가 모란봉에서 내려오고말았다고 한다.

김황원에 뒤이어 모란봉의 부벽루에 찾아온 많은 사람들 역시 북받쳐오르는 시적충동을 누를길 없어 제나름대로 부벽루의 경치를 노래하군 하였다.

14세기 문인인 윤택은 부벽루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시를 후세에 남기였다.


부벽루

벼랑턱의 높은 루정 위태롭다 말을 마오

학을 타고 강건느듯 황홀하기 그지없소

들꽃들이 만발하니 봄기운이 완연하고

가지마다 맺힌 이슬 달빛으로 아롱졌소


가랑비가 그친 뒤라 뭉게구름 장쾌하니

아름다운 록음방초 어느때면 펼치려나

루정앞이 무연하니 끝간데가 어드메뇨

산과 구름 엉켰으니 안보인다 근심마소

시인들을 뒤질세라 옛 화가들도 아름다운 평양의 경치를 그리면서 의례히 부벽루의 절경을 화폭에 담았다.

18세기 우리 나라의 사실주의화가인 김홍도 역시 부벽루에 올라 《부벽루연회도》를 그려 력사에 남기였다.

19세기에 평양성을 그린 그림들에서도 부벽루와 을밀대를 비롯한 모란봉의 전경을 대번에 찾아볼수 있다.

한낮에 부벽루에 올라 푸른 물결 출렁이는 대동강과 나무숲 설레이는 릉라도, 아득히 펼쳐진 벌판과 우뚝우뚝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을 굽어보는것도 황홀경이지만 음력 보름날 특히는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부벽루에 올라 은대야같이 환한 보름달을 바라보는것은 더욱 가관이였다.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은 정월대보름날 저녁이 오면 너도나도 마을의 높은 산이나 다리, 언덕, 루정 등에서 보름달을 정겹게 바라보면서 새해농사의 대풍작과 가정의 행복이 깃들기를 바라며 서로서로 이야기들을 나누는것을 하나의 풍습으로 여겨왔다.

평양사람들도 저저마다 정월대보름날 저녁이면 청류벽에 올라 달맞이를 하면서 이날밤을 즐겁게 보냈다.

청류벽의 높은 마루에 우뚝 솟은 부벽루의 경치중에서 제일로 손꼽는것은 부벽루에서 둥실 떠오르는 밝은 달을 바라보는 풍경이였다.

옛 사람들은 평양8경의 하나인 부벽루의 달맞이를 《부벽완월》(浮碧翫月)이라고도 일러왔다.

15세기사람인 조위(1454-1503)는 《부벽완월》 즉 《부벽루의 달맞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부벽루의 달맞이

하늘 중천 루각우에 무지개빛 비껴드니

넓은 벌과 뭇산들은 눈아래로 보이누나

란간옆에 기대서니 둥근달이 둥실둥실

물결속에 비쳐드니 수정구슬 반짝반짝


강물우에 달빛 넘쳐 푸른 물결 출렁이고

환한 달빛 눈부시니 갈대꽃이 피여난듯

이 한밤이 깊어간다 바람, 이슬 마다하랴

하늘 신선 불러불러 새납소리 울리누나

이렇듯 뛰여난 건축술과 아름다운 경치로 하여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령남루와 더불어 조선3대루의 하나로 이름높았던 부벽루가 임진조국전쟁시기 왜적들의 야만적인 파괴행위로 인하여 불타버리게 되자 평양사람들은 1614년에 부벽루를 다시 일떠세워 평양의 자랑으로, 모란봉의 명승으로 계속 전해지도록 하였다.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천하절승으로 새겨진 부벽루는 조선을 강점하고 수많은 문화재들을 략탈, 파괴한 일제의 조선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혹심하게 파손되였다.

해방직후인 주체35(1946)년 9월 8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평양시인민위원회 일군들에게 모란봉의 부벽루만 보더라도 이름있는 옛 루정인데 기둥과 서까래가 썩고 한쪽이 허물어져 그 우아한 옛 모습을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고, 지금과 같이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제대로 보존관리하지 않으면 그것은 얼마 못가서 다 못쓰게 되고말것이라고 못내 가슴아픈 어조로 교시하시면서 부벽루를 비롯한 모란봉의 유적들을 시급히 복구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민족애에 의하여 새 조국건설시기 모란봉일대의 력사유적들은 빠른 기일안에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 미제의 야만적인 폭격에 의하여 부벽루가 참혹하게 파괴되였을 때에도 평양시민들은 모란봉을 인민의 유원지로, 근로자들의 문화휴식터로 전변시켜주시려는 위대한 수령님의 원대한 구상을 새겨안고 부벽루를 비롯한 모란봉의 고적들을 옛모습 그대로 훌륭히 일떠세웠다.

오늘날의 부벽루는 위대한 수령님위대한 장군님의 세심한 지도와 배려, 경애하는 김정은동지의 민족문화유산보호정책에 의하여 모란봉과 더불어 평양의 절승으로, 인민들이 즐겨찾는 문화휴식터로 더욱 이름 떨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