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는 후대들에게 우리 민족의 유구한 애국전통과 찬란한 문화를 소개하고 조국애를 고취할 일념밑에 국사서술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바친 사람이다. 》 (《
신채호(호는 단재, 1880-1936년)는 대표적인 근대계몽사상가이며 애국적인 국학자, 문필가이다. 신채호는 1880년 충청북도의 지방 량반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전통적인 유교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새로운 사상조류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근대문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소유하고 여러 분야에 대한 심오한 분석과 독특한 견해를 가지게 됨으로써 대표적인 국학자로, 재능있는 문필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였다.
신채호가 활동한 시기로 말하면 일본군국주의의 침략책동으로 하여1905년에 《을사5조약》이 강요되고 1910년에는 우리 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고있던 망국의 시기였다. 일제는 강도적인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고 야만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인적, 물적자원을 악착하게 략탈하였을뿐아니라 지어는 우리 인민의 말과 글, 이름까지도 빼앗기 위하여 책동하였다.
조성된 이러한 정세로부터 신채호를 비롯한 시대의 선각자들은 국권회복을 위한 길을 모색하면서 그 방도의 하나로 국학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국학(國學)이란 일반적으로 자기 나라의 국사, 국어, 국문 등을 연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19세기 60년대이후 긴박하게 조성되였던 망국의 기운에 대처하여 19세기 70-80년대에 시작되여 20세기초까지 본격적으로 전개되였던 국학운동은 나라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한 애국문화운동의 일환으로서 우리 나라의 력사 즉 국사와 우리 나라의 말과 글 즉 국어, 국문을 옹호고수하고 발전시킴으로써 인민들속에 강렬한 민족의식을 고취하여 국권을 수호할것을 목적으로 하는 애국적학술연구, 대중계몽운동을 가리킨다.
국권수호를 위한 시대적요구에 대처하여 애국적지식인들앞에는 광범한 인민들속에 열렬한 애국정신, 강렬한 민족의식을 심어줌으로써 나라의 독립을 고수하고 근대적발전을 실현하기 위한 절박한 과제가 제기되고있었다.
신채호는 당시의 시대적요구에 호응하여 학문연구를 한적한 서재에서 글이나 읽고 작품이나 쓰는 단순한 문필활동에 그치지 않고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고 나라의 독립을 이룩하는 실천투쟁과 밀접히 결부하여 진행하였다.
신채호는 우리 나라 력사에 대한 여러 저술에서 일련의 언어문제와 관련한 자기의 독특한 견해를 내놓음으로써 이 시기 력사언어학연구에서 일련의 성과를 달성하였다.
첫째로, 고대조선의 언어상태를 언급하면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조선반도와 중국의 동북일대의 언어통일이라고 하면서 중국의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 부여, 옥저, 예, 마한, 진한 등의 언어가 같았다고 론증한것이다.
그는 고구려-부여어와 삼한어가 서로 다른 계통의 언어라고 떠들던 당시 일본의 어용학자들의 황당한 주장에 대하여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조선반도와 동북 3성을 포함하여 우리 나라의 광활한 령역에서 우리 조상들이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있었던 력사적사실에 대하여 강력히 주장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사연구초》에 수록한 《전후삼한고 (前後三韓考)》에서 《당시에 가장 놀랄만한 사실은 현조선 각지와 東三省 각지의 언어통일이다》라고 하면서 옛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 부여, 옥저의 지방은 곧 흑룡, 길림, 평안, 함경 등이니 이 여러 지방의 언어가 동일》하며 삼한도 역시 그곳과 언어가 같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 근간으로 된 말은 역시 당시 가장 강대하였던 고구려의 말이였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영국사를 보면 16세기까지도 런던과 웰스가 서로 가까운 지방이면서도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반면에 《조선은 고대에 적지 않은 강토에서 언어, 풍속이 남보다 먼저 통일된 민족》으로 존재하였으니 이것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고 긍지높이 자랑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여러 문헌과 금석문사료에 나오는 고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언어상태를 추정하면서 당시 언어의 동질성을 주장하였으며 그것이 력사적으로 계승되여온 과정에 대해서 자료적으로 론증하였다.
둘째로, 리두식표기로 된 인명, 지명에 대한 해독을 통해 리두식표기의 독법을 밝힘으로써 리두학발전에 기여한것이다.
그는 《조선사연구초》에 수록한 《고사상 리두문 명사해석(古史上 吏讀文 名詞解釋)》에서 우리의 옛 문헌들에서 인명, 지명, 관직명의 표기에 널리 쓰이고있는 리두식표기에 대하여 《리두문은 한자의 全音, 全義 혹은 半音, 半義로 만든 일종의 문자》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리두식표기의 본질에 대한 옳은 정식화라고 할수 있다
종전에는 흔히 이것을 《한자차자법(漢字借字法)》이라고 막연하게 말해왔을뿐이였다.
그러나 사실상 리두식표기는 우리 조상들이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서 우리 말을 표기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독특한 서사체계로서 그 본질을 이처럼 정식화한것은 신채호의 공적에 속하는것이라고 할수 있다.
신채호는 옛 고유어지명의 리두식표기와 개정한 한자어지명의 대응관계를 과학적으로 분석한데 기초하여 고유어로 된 지명단위어를 류형별로 묶고 분석하는 작업도 하였다.
신채호는 물론 언어학전문가가 아니였으나 애국주의적립장에서 우리 나라 력사를 서술하는 과정에 제기되는 언어문제를 다방면적으로 다루어 우리 나라의 언어발전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신채호의 력사언어학연구는 옛 문헌에 나오는 리두식표기에 대한 정확한 리해를 가지고 당시의 언어상태와 력사적사실에 대하여 옳은 인식을 가질수 있게 하는데서 길잡이의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지난날 우리 말 력사발전에서 결정적역할을 한 고구려의 언어를 깊이 연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한 점에서 공적이 적지 않았다고 할수 있다.
이처럼 신채호는 시대적조류의 앞장에 서서 국사학, 국어학, 국문학을 탐구하고 문필활동을 벌리면서 그것을 사회적실천과 결부시켜 정력적으로 국학운동을 전개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초기국학운동의 선구자의 한사람이였다고 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