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영결보고가 아니라 영접보고를

 2022.10.31.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전체 인민이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수령님을 추모한 나날은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깊이 심어준 나날이였습니다.》 (김정일선집》 증보판 제18권 32페지)

28년전 7월 전체 인민이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위대한 수령님을 추모한 나날은 우리 인민들의 마음속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깊이 새겨준 나날이였다.

우리 인민은 위대한 수령님과의 영결의식이 진행되던 날에 조선인민군 명예위병대 대장이 위대한 수령님께 올리는 영접보고를 접할 때에도 수령영생의 신념을 더욱 굳게 가다듬게 되였다.

사실 명예위병대 대장이 위대한 수령님께 영결보고가 아니라 영접보고를 올리게 된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주체83(1994)년 7월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과의 영결식을 하루 앞둔 날이였다.

사열의식을 준비하던 명예위병대 대장이 졸도하는 비상사고가 발생하였다.

하루밤이 지나면 영결행사가 있게 되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을지 몰라 일군들의 속은 탈대로 탔다. 이제라도 다른 사람을 선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였다.

일군들로부터 이러한 사실을 보고받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였다.

생전에 명예위병대 대장을 두고 젊은 동무가 목청이 높고 듣기도 좋으며 보고를 잘한다고, 대렬동작이 절도있고 씩씩하다고 하시며 그의 보고를 받으실 때마다 무척 대견해하시던 우리 수령님의 모습이 뜨거운 추억을 불러오시였던것이다. 그런 동무가 위대한 수령님께 마지막사열보고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으니 그 마음이 오죽 쓰리고 아프랴싶으시였다.

잠시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에게 그의 심중이 오죽하겠는가고 하시면서 왜 위대한 수령님께서 돌아가셨다고만 생각하는가, 영결식을 해도 수령님의 령구차가 연도에 나갔다가 다시 금수산의사당(당시)으로 돌아오는데 생존해계시는 수령님을 영접한다는 심정으로 보고하면 되지 않는가고 교시하시였다.

순간 일군들은 떨구었던 고개를 쳐들고 위대한 장군님을 우러렀다.

영결보고가 아니라 영접보고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철의 신념을 간직하신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를 일군들은 가슴깊이 새겨안았다.

위대한 수령님의 영생은 억만년 불변하다는 억척의 신념을 새겨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교시는 곧 명예위병대 대장에게 전달되였다.

크나큰 슬픔을 안고 쓰러졌던 명예위병대 대장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드디여 영결식날이 왔다.

위대한 수령님을 모신 령구차가 수백만 군중이 늘어선 100여리 눈물의 바다를 거쳐 다시 금수산의사당(당시)으로 들어섰다. 순간 찌렁찌렁한 구령소리가 비애의 피눈물이 가득 고인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며 울리였다.

조선인민군 륙해공군명예위병대는 만민의 태양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정렬하였다고 정중히 보고올리는 명예위병대 대장의 영접보고는 우리 수령님께서 생존해계실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영접보고였다.

하늘가에 울려간 우렁찬 영접보고는 위대한 수령님은 주체의 태양으로 영생하신다는것을 온 세상에 알리는 엄숙한 선언이였다.

세월이 흘러가도 조선인민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신념을 더욱 굳게 새기던 7월의 그 나날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