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네케르사건은 민주도이췰란드가 서부도이췰란드에 흡수통합되면서 생겨난것으로서 도이췰란드당국이 사회주의민주도이췰란드의 지도자였던 호네케르를 《범죄자》라고 하면서 재판에 기소한 사건이다.
호네케르는 사회주의민주도이췰란드의 당총비서로, 국가쏘베트위원장으로 20년간이나 있으면서 자기 인민을 위하여, 사회주의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한 견실한 혁명가였지만 사회주의배신자들에 의하여 1989년 10월 당총비서, 국가쏘베트위원장자리에서 쫓겨났다.
원래 도이췰란드당국은 《통합》이후에 민주도이췰란드지도자를 처형하지 않으며 정치적보복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었다. 그러나 1990년 10월의 《통합》이후 당국은 공산당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하고 대대적으로 검거투옥하였다. 여기서 호네케르도 결코 례외로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당시 민주도이췰란드에 주둔해있던 쏘련군대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있던 호네케르는 쏘련군대 군용비행기를 타고 1991년 3월 쏘련으로 가서 심장암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수술이 끝나자 도이췰란드당국은 호네케르를 재판할수 있도록 보내달라고 쏘련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딸라를 휘두르면서 사회주의배신자들과 흥정판을 벌려놓았다.
도이췰란드당국의 압력과 유혹에 굴복한 사회주의배신자들은 호네케르에게 1991년 12월 13일 24시까지 자국령내를 떠나라는 추방령을 내렸다. 이것은 갈곳이 없는 호네케르가 제정된 시간에 로씨야땅을 떠나지 못하면 그때에 도이췰란드로 강제압송하자는 비렬하기 그지없는 모략이였다.
의리도 량심도 인간의 체면도 다 저버린 사회주의배신자들의 고약한 처사에 격분한 호네케르는 자기의 처와 함께 모스크바주재 칠레대사관으로 피신하였지만 칠레정부에서도 그들의 입국을 승인하지 않았다.
사실 호네케르는 집권시 삐노체뜨군사정권의 박해를 피하여 민주도이췰란드로 망명해온 수백명의 칠레사람들을 잘 돌보아준것으로 하여 칠레와 매우 친숙하였고 자기의 딸도 칠레사람에게 시집을 보냈었다. 그러한 칠레도 역시 호네케르를 배반하였던것이다.
하지만 호네케르는 락심하지 않았다. 호네케르는 침상에서 자기 운명문제를 놓고 깊이 생각한 끝에 결심을 내리고 부인 마르코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
마르코트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였다.
일찍부터
호네케르는 드디여 편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존경하는
저는 1991년 12월 13일까지 로씨야련방령토를 떠나야 합니다.
…제가 귀국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저의 건강에 매우 유리하리라고 봅니다.
가능하시다면 당신께서 모스크바주재 귀국 대사관을 통하여 이와 관련한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산주의적인사를 드립니다.
에리히 호네케르 1991년 12월 11일 모스크바.》
호네케르의 편지를 전달받은 모스크바주재 우리 나라 대사관에서는 조국에 긴급전문을 보냈다. 이에 대하여 보고받으신
혁명적의리를 혁명가의 인생관으로 여기시는 우리
그때가 바로 우리 나라 시간으로 새벽 4시, 모스크바에서는 12일 22시쯤 되는 시간이였으니 호네케르에게는 불과 하루남짓한 시간적여유밖에 없었다.
인도주의원칙에서 필요한 방조를 제공하려 한다는 우리의 제의에 로씨야련방은 호네케르가 떠나는 기한을 16일까지로 연장하기로 하였다.
호네케르를 구출하기 위한 새로운 전투를 지휘하시는 한편
그는 신심에 넘쳐 로씨야관리들에게 자기의 정당한 요구를 들이댔다.
《나는 지금 앓고있다. 그래서 조선에서 치료를 받으려는 희망을 표시했다. 나는 조선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받았다. 나는 꼭 조선으로 가겠다.》
호네케르는 자기의 요구를 글로 써서 로씨야당국에 전달하였으나 아무런 대답도 받지 못했다.
마침내 추방령 마감날자인 16일이 되였다.
결정적인 시각에
16일 이른아침, 우리 나라의 대형려객기가 모스크바교외 쉐레메찌예보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비행기에서는 내리는 승객이 없었다. 타고온 손님이 없었던것이다.
이렇게 되자 호네케르에 대한 추방령은 흐지부지되고말았다. 한편 칠레정부는 호네케르를 도이췰란드로 강제압송하도록 하지 않겠다고 성명하였다.
그리하여 호네케르는 강제추방의 위험을 면하게 되였다.
호네케르사건을 두고 세계 각국에서는
《
그 이듬해인 1992년 6월 29일 평양을 방문한 스웨리예공산주의자로동당 위원장을 접견하신 자리에서
1992년 여름 호네케르는 도이췰란드로 갔다.
그는 재판정에서 공산주의자의 당당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한생을 도이췰란드인민을 위하여 바쳤으며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헌법을 지켰다. 나는 외국은행에 단 한푼의 돈을 예금한것이 없다. 나에 대한 재판은 그릇된 정치적보복행위이다.》
세계여론은 호네케르의 주장을 지지하고 당국의 재판을 비난하였으며 결국 재판은 중지되게 되였다. 그후 호네케르는 앓는 몸으로 딸이 사는 칠레로 갔다.
호네케르는 대동강반에 집까지 마련해놓고 기다리는 평양, 혁명적의리의 위대한 귀감이신 우리
비록 호네케르는 사망하였으나 이 사건을 두고 전세계가 세차게 끓어번지였다.
한때는 호네케르를 《도이췰란드인민의 탁월한 지도자》,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이름있는 활동가의 한사람》, 《가장 믿음직한 동맹자》, 《친근한 벗이며 동지》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늘어놓던자들이 헌신짝처럼 버린 그를 혁명적의리로 지켜주신분은 오직 우리
참으로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