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고구려의 개마무사

 2024.9.5.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고구려군대의 구성에서도 기병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있었고 고구려군사들은 기병전에 매우 능하였습니다. 옛날 책에 쇠갑옷을 입고 긴창, 긴칼을 들고 돌진하는 고구려기병을 매우 무서운 존재로 묘사한것은 우연한것이 아닙니다.》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이름 높았던 고구려의 기병에는 사람과 말까지 두터운 갑옷을 입은 개마무사들이 있었다.

고구려시기에는 갑옷을 입은 말을 개마라고 하고 그러한 말을 탄 군사를 개마무사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개마무덤벽화에는 주인공이 갑옷을 입힌 말을 타려고 하는 장면과 그옆에 《무덤주인이 개마를 타려고 하는 모습》이라는 글이 있다.

개마무덤의 벽화
그림 1. 개마무덤의 벽화

개마무사가 그려진 고구려벽화무덤들은 고국원왕무덤, 마선구1호무덤, 통구12호무덤, 약수리벽화무덤, 세칸무덤, 덕흥리벽화무덤, 개마무덤 등이다.

이가운데서 고국원왕무덤이 4세기중엽으로서 제일 이른 시기에 해당한다. 여기에 그려진 개마무사의 장비는 이미 완성된 모습이므로 처음으로 출현한 시기는 그보다 이르다고 볼수 있다.

고구려의 력사를 전하는 력사책인 《삼국사기》에는 246년 동천왕이 침략군과의 싸움에 5 000명의 철기(개마무사들로 이루어진 기병)를 동원하였다고 기록되였다.(《삼국사기》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그러므로 고구려에서 개마무사는 3세기경에 출현하였다고 보고있다.

개마를 탄 무사는 투구와 갑옷, 금동신 등 견고한 장비로 온몸을 감쌌다.

통구12호무덤의 무사
그림 2. 통구12호무덤의 무사

투구는 머리의 웃부분과 량옆, 뒤부분을 보호할수 있게 되였다.

투구(복원)
그림 3. 투구(복원)

갑옷은 목이 높고 긴 팔소매와 발목까지 가리는 바지로 이루어졌다.

금동신은 금동판으로 신발을 만들고 바닥에는 뾰족한 징못을 촘촘히 박은것이다.

금동신
그림 4. 금동신

개마장비가 제일 잘 묘사된 장면은 개마무덤벽화에 있다.

고구려의 개마장비는 크게 말투구와 말갑옷, 개마장식으로 이루어졌다.

말투구는 크게 투구본체와 그의 꼭대기에 결합된 보호판으로 이루어졌다. 투구본체는 말대가리의 웃면과 옆면을 가리울수 있게 형태를 잡아 재단하여 조립한것이다. 보호판은 기마수의 얼굴과 말의 귀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는데 보통 반원형의 통판으로 된것과 가운데에 넓은 판이 있고 량옆에 작은 판이 련결된 3잎형이 있다. 3잎형보호판에서 가운데의 넓은 판은 기병의 얼굴을, 량옆의 작은 판은 말의 두귀를 보호해준다.

말갑옷은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하여 따로따로 착용할수 있게 하였다.

구성상태를 보면 크게 말의 목을 감싸는 목갑, 가슴과 어깨부분을 가리우는 가슴갑, 허리부분에 씌우는 몸통갑, 뒤부분을 막아주는 엉뎅이갑으로 이루어졌다.

개마장식은 말안장의 뒤부분에 설치한 장식물이다. 보통 기발, 부채, 참대가지, 짐승꼬리 등 여러가지 형태로 만들어 안장에 설치한 쇠틀에 고정하였다. 개마장식은 장식적인 목적과 함께 전투시 기마수의 뒤부분을 가리워주는 실용적인 기능도 수행하였다.

고구려의 말투구와 말갑옷을 만드는 재료는 가죽과 철이였다.

고구려무덤벽화들에 그려진 개마들을 보면 가죽투구는 재료가 유연하므로 말대가리의 웃부분과 옆부분을 통채로 덮을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철투구는 말대가리의 형태에 맞게 철판을 재단하여 조립하였으므로 굴곡이 심하다.

말갑옷도 가죽제와 철제가 있는데 벽화에서도 명백히 구분할수 있다. 가죽갑옷은 비교적 넓은 가죽판들을 조립하여 만든것이므로 개개의 갑옷쪼각들이 상대적으로 크게 그려지거나 갑옷 전체가 하나의 색갈로 묘사되였다. 실례로 고국원왕무덤의 가죽제말갑옷은 목갑, 가슴갑, 몸통갑과 같은 부분품들의 경계만 그려지고 매 부분들은 한가지 색갈로 칠하였다.

고국원왕무덤벽화에 그려진 개마무사의 가죽갑옷(왼쪽)과 철갑옷(오른쪽)
그림 5. 고국원왕무덤벽화에 그려진 개마무사의 가죽갑옷(왼쪽)과 철갑옷(오른쪽)

그런가 하면 철로 만든 갑옷은 작은 찰갑유물이 명백히 묘사되고 지어는 매 찰갑유물의 변두리에 그은 장식선과 가운데에 뚫어놓은 공기구멍까지 묘사되여 쉽게 알수 있다.

고구려의 말투구와 갑옷은 가죽과 철을 재료로 사용하다가 점차 전부 철판으로 만드는데로 넘어갔다.

대체로 4세기경까지는 가죽제와 철제갑옷과 투구가 1:1로 쓰이고 5세기경에 가서는 기본적으로 철제갑옷과 투구를 사용하는데로 넘어갔다. 4세기중엽에 해당하는 고국원왕무덤의 행렬도와 약수리벽화무덤의 개마도에는 가죽갑옷과 철갑옷을 착용한 개마가 같은 수를 차지한다. 그런가하면 5세기초에 해당하는 덕흥리벽화무덤의 개마행렬도에는 다 철갑옷을 입은 개마들만이 그려져있다.

덕흥리벽화무덤의 개마행렬
그림 6. 덕흥리벽화무덤의 개마행렬

고구려무덤벽화들에는 개마장비를 갖춘 기병들의 전투모습이 생동하게 그려져있다. 실례로 세칸무덤의 벽화에는 2명의 개마무사들이 싸움을 하는 장면이 있다.

세칸무덤의 개마무사전투도
그림 7. 세칸무덤의 개마무사전투도

전투에서 개마무사들의 기본사명은 현대의 땅크나 장갑차와 같은 장갑무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것이였다.

중세의 싸움은 많은 경우 진을 치고 진행하였는데 진을 공격하자면 비발치는 화살과 투창 등으로부터 사람과 말을 보호하는것이 사활적인 문제로 제기되였다.

전투시 먼저 두터운 철갑을 갖춘 기병이 긴창을 비껴들고 선두에서 적의 화살과 창의 장막을 헤치며 적진을 허물어버리면 그 뒤로 칼과 짧은 창을 든 경기병이 따라오면서 갈팡질팡하는 적들을 쓸어버리는 전법을 쓰군 하였다.

적진으로 돌진하는 개마기병대(약수리벽화)
그림 8. 적진으로 돌진하는 개마기병대(약수리벽화)

고구려사람들은 수십, 수백만의 병력으로 쳐들어온 적들을 난공불락의 요새인 산성에 의거하여 방어도 하였지만 결정적인 계기에는 개마무사들로 이루어진 강력한 개마기병대를 기둥으로 공격무력을 편성하여 적들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주군 하였다.

그런것으로 하여 긴창과 긴칼을 들고 돌진하는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은 적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으로 되였다.

나라를 지켜 목숨바쳐 싸우는것을 커다란 영예로 여기는 높은 애국심과 함께 당시로서는 가장 발전된 개마장비를 갖춘 강력한 기병은 고구려가 동방의 천년강국으로 위용떨칠수 있은 중요한 요인들로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