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조선의 력사유적유물

 2014.10.31.

1) 동명왕릉


동명왕릉은 우리 나라에서의 첫 봉건국가인 고구려의 시조왕 동명성왕(고주몽)의 무덤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동명왕릉은 우리 나라 력사와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유적입니다.》 (김일성전집》 제85권 425페지)

동명왕릉은 평양시 력포구역 룡산리에 자리잡고있다.

동명왕릉은 돌기단이 있는 돌칸흙무덤이며 무덤의 내부는 무덤길 ,앞칸, 안칸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내부 벽면과 천정에는 련꽃무늬를 형상한 벽화가 그려져있다. 발굴당시 4각추모양으로 된 무덤무지의 총 높이는 8.15m인데 그가운데서 돌기단(한변의 길이 22m)의 높이가 1.5m, 기초석의 높이가 0.15m였다. 무덤옆에는 약 5m너비로 강자갈을 깐 무덤구역시설이 있었다.

무덤에서는 금 또는 금동으로 된 각종 형태의 보요들을 비롯하여 일부 유물들이 발견되였다.

동명왕릉의 주변에서 수많은 고구려유적들이 발굴되였다. 왕릉앞 150m 지점에서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설한 정릉사의 터가 드러났으벼 왕릉을 중심으로 하여 15기의 달린무덤(배총)들이 동명왕릉을 앞뒤에서 보위하듯이 분포되여있다.

동명왕릉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현명한 령도밑에 전면적으로 발굴정리되고 그 성격이 명백히 밝혀지게 되였으며 새로 개건되여 그 모습을 온 세상에 널리 자랑할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주체63(1974)년 1월 23일 교시를 높이 받들고 진행한 동명왕릉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과정에 이 유적에서 고구려무덤벽화가 알려지고 왕릉임을 증명하는 귀중한 유물들이 나왔으며 무덤앞에서 《정릉사》터가 발견됨으로써 이 무덤이 다름아닌 동명왕의 무덤이라는것이 확증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78(1989)년 4월 친히 동명왕릉을 돌아보시면서 고구려의 시조왕릉을 원상대로 개건할데 대한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그후 여러차례 동명왕릉건설총계획사판과 도면을 보아주시면서 개건될 동명왕릉의 매 구조물들의 규모와 형태, 그 위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르쳐주시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어버이수령님의 구상을 실현하시기 위하여 동명왕릉개건에 강력한 건설력량을 보내주시고 개건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들을 다 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들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동명왕릉은 주체82(1993)년 5월에 우리 나라에서의 첫 봉건국가 고구려를 세운 시조왕의 릉답게 높은 수준에서 개건될수 있었다.

개건된 동명왕릉은 크게 왕릉구역, 정릉사구역, 진주못구역 등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있다.

왕릉구역으로 들어가면서 릉문앞동쪽에 《동명왕릉개건기념비》가 세워져있다. 비석앞면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활달한 필체로 써주신《東明王陵改建紀念碑》(동명왕릉개건기념비)라는 비석이름이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위대한 수령님들의 불멸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지은 헌시가 새겨져있다.

새로 개축된 왕릉은 기단 한변의 길이가 32m, 높이 2.1m이며 3단으로 기단이 쌓아져있으며 그우에 높이 9.4m의 봉분이 있다. 왕릉의 총 높이는 11.5m이다. 왕릉앞에는 돌로 만든 제상과 돌등, 왕릉앞면 좌우에 세운 망주석 등 시설물들이 세워져있다.

동명왕릉의 앞에 동명왕을 받들어 고구려국가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한 고구려대신들을 형상한 조각상들이 세워져있다.

오랜 세월 전설로만 전해져오던 동명왕릉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천리혜안의 예지와 뜨거운 손길에 의하여 그 성격이 뚜렷이 밝혀지게 되였으며 위대한 수령님들의 현명한 령도밑에 훌륭히 개건되여 동방의 천년강대국 고구려의 위용을 남김없이 보여주고있다.

개건전 동명왕릉전경
개건전 동명왕릉전경
개건전 동명왕릉전경
개건전 동명왕릉의 정면
동명왕릉무덤칸실측도
동명왕릉무덤칸실측도
동명왕릉무덤칸투시도
동명왕릉무덤칸투시도
무덤칸내부의 련꽃무늬벽화
무덤칸내부의 련꽃무늬벽화
새로 개건된 동명왕릉
새로 개건된 동명왕릉
개건된 동명왕릉의 정면
개건된 동명왕릉의 정면
동명왕릉의 제당
동명왕릉의 제당

2) 안학궁터

안학궁터는 고구려가 평양의 대성산일대에 수도를 정하고있던 시기의 왕궁터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안학궁은 토성안에 자리잡고있습니다. 네모진 토성은 한변의 길이가 600여m가 넘는데 지금도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토성안의 넓은 부지에 규모가 크고 웅장화려한 궁전이 건설된것만 보아도 고구려가 얼마나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습니다.》 (김정일전집》 제3권 121페지)

안학궁터는 대성산 소문봉의 남쪽기슭(오늘의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 위치하고있다.

안학궁터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대성산일대의 력사유적들을 전면적으로 발굴고증할데 대하여 주신 교시를 받들고 주체47(1958)년부터 주체59(1970)년까지 10여년간에 걸쳐 발굴하였다.

안학궁터에 대한 대규모의 발굴을 통하여 안학궁성의 규모와 성벽구조, 6개의 성문터, 해자 및 수구문과 못자리들을 밝혀냈으며 총건평이 31 458m2에 달하는 52채의 건물터들과 이곳에 있는 2590개의 기둥자리들을 찾아냈다.

안학궁은 성벽과 궁전터들로 이루어져있었다.

안학궁성은 한변의 길이가 각각 622m이고 그 둘레가 2 488m에 달하는 네모난 성으로서 그 부지면적은 약 38만m2나 된다. 궁성의 성벽은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다. 성벽에는 모두 6개의 성문 (남쪽 3개, 동, 서, 북쪽에 각각 1개)과 2개의 수구문(북쪽과 남쪽)이 있었다. 남문터는 성문들가운데서 제일 큰것으로서 그 규모는 정면 7간(37.5m), 측면 2간(10m)이였다.

궁성의 동쪽과 서쪽 성벽밖에 해자를 설치하였다.

안학궁의 궁전터는 소문봉의 남쪽 완만한 경사면에 있는데 터의 지형은 북쪽과 중심부분은 높고 서남쪽과 동쪽이 낮다.

안학궁성의 안에는 크고작은 52채의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 건물들은 5개의 건축군을 이루고있었다. 5개의 건축군은 남북중심축을 기준으로 하여 동서로 대칭을 이루고있어 그 배치가 매우 규칙적이고 정연하였다. 5개의 궁전(남궁, 중궁, 북궁, 동궁, 서궁)들은 회랑에 의해 서로 련결되여있었다. 남궁은 국가적인 행사를 하던 정전이였다. 남궁의 북쪽에 있는 중궁은 왕이 일상적으로 정사를 보던 궁전이였다. 중궁의 1호궁전은 안학궁의 궁전들가운데서 제일 큰것인데 앞면의 길이가 87m이고 옆면은 앞뒤채를 합하여 27m였다. 북궁은 침전 즉 왕이 일상적으로 생활하던곳으로 보인다.

북궁의 동쪽에 따로 놓인 동궁은 왕위를 이을 태자가 살던곳이였다. 서궁구역은 왕후, 귀비, 공주들이 살던곳으로 추정하는데 여기에도 여러채의 건물들이 있었다.

이밖에도 궁전에는 정원과 련못, 돌로 포장한 도로가 있었다.

방대한 면적을 차지한 궁전터에서는 기와, 치미, 귀면, 유리, 벼루, 질그룻 등 고구려의 고유한 유물들이 나왔다.

오늘 안학궁터는 동방의 천년강국 고구려의 강대성과 문화발전면모를 과시하는 조선민족의 귀중한 문화재부로 잘 보존되여있으며 우리 인민들을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으로 교양하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안학궁터전경
안학궁터전경
안학궁터평면실측도
안학궁터평면실측도
안학궁터항공사진
안학궁터항공사진
안학궁 북궁터전경
안학궁 북궁터전경
안학궁 남궁 회랑터전경
안학궁 남궁 회랑터전경
안학궁터의 주추돌
안학궁터의 주추돌
안학궁 남궁터전경
안학궁 남궁터전경

3) 대성산성


대성산성은 고구려가 국내성(중국의 집안)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수도방위를 목적으로 쌓은 산성이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대성산성은 고구려의 력사와 고구려사람들의 뛰여난 슬기를 보여주는 오랜 유적의 하나입니다.》 (《김정일전집》 제3권, 277페지)

대성산성은 평양시 대성구역의 대성산에 위치하고있는데 을지봉, 소문봉, 장수봉, 북장대, 국사봉, 주작봉 등 6개 봉우리들의 릉선을 따라 쌓아져있다.

대성산성은 대성산을 인민들의 문화휴식터로, 민족적긍지와 애국주의정신을 심어주는 훌륭한 교양장소로 꾸릴데 대하여 주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에 의하여 주체47(1958)년부터 전면적으로 발굴되였다.

대성산성은 고구려의 산성들가운데서도 가장 큰것에 속하는 성이다.

대성산성은 높이가 274m인 을지봉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에 있는 5개 산봉우리들의 릉선을 서로 련결시켜 쌓은 성이다.

대성산성의 성벽둘레는 7 076m이며 성벽총길이(2중성벽, 3중성벽을 포함)는 9 284m이다. 소문봉에서 남문을 지나 주작봉에 이르는 구간은 2중성벽으로서 그길이가 980m이며 주작봉과 국사봉사이의 골안에는 3중성벽을 쌓았는데 그 길이는 1 228m이다.

성벽은 대성산일대에 풍부히 매장되여있는 사암을 일정한 형태와 크기로 다듬어서 지형조건에 알맞게 기초공사를 하고 그우에 견고하게 쌓았다.

고구려사람들은 대성산성 내부와 성벽의 여러곳에 부속시설물들을 설치함으로써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수 있게 하였다.

성에는 소문봉과 주작봉사이에서 골짜기를 가로 지나는 2중성벽의 중심부에 웅장하게 지은 남문을 비롯하여 20개의 각이한 형태의 문, 성문의 방어력을 강화하는 시설로서의 옹성, 성벽의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벽의 일정한 지점에 설치한 65개의 치, 지휘처로서 장대 등이 있었다.

대성산성안에는 많은 못들이 있었다. 옛기록에 의하면 성안에는 99개의 못이 있었으며 그중 3개의 못에 물이 항상 고여있었다고 한다. 대성산성에 대한 발굴과정에 조사한데 의하면 이곳에는 170여개소의 못자리가 있다. 못들은 지하수를 리용하여 만든것이 더 많다.

대성산성안에는 여러개의 집자리가 있는데 특히 장수봉남쪽기슭에서 길이가 80m나 되는 집자리가 발견되였다.

대성산성에서는 유물들이 적지 않게 알려졌는데 그가운데서 중요한것은 돌함속에 들어있는 책, 돌궤안에서 나온 2개의 금동불상, 마구와 방울, 질그릇과 기와 등이다. 책은 《묘법련화경》이라고 하는 불경책으로 추정하고있으며 금동불상은 우리 인민들의 슬기와 재능,불교가 고구려에 어떻게 전파되였는가를 해명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가치있는 유물들이다.

대성산성은 주변에 배치된 청암동토성, 고방산성, 청호동토성 등과 함께 정연한 성방어체계를 이루고있어 강대한 고구려의 수도방위력을 한층 강화해주고있다.

대성산성은 우리 나라에서만 볼수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방어체계와 시설을 갖추고 축조된것으로서 고구려사람들의 뛰여난 슬기와 재능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대성산성전경
대성산성전경
대성산성과 안학궁일대의 고구려유적
대성산성과 안학궁일대의 고구려유적
대성산성의 구룡못전경
대성산성의 구룡못전경
구룡못실측도
구룡못실측도
구룡못의 돌축조상태
구룡못의 돌축조상태
대성산성에서 발견된 돌궤와 그속에서 나온 금동불상
대성산성에서 발견된 돌궤와 그속에서 나온 금동불상
불경책
불경책
돌함
돌함

4) 고구려첨성대터


고구려첨성대터는 고구려시기 조선의 선조들이 기상천문현상들을 구체적으로 관측하기 위해 세운 첨성대의 터이다.

고구려사람들은 견고하고 훌륭한 천문대와 관측기구들을 가지고 하늘의 해와 달, 별을 관측하고 기록하는 사업을 꾸준히 진행하여 기상학과 천문학의 발전에 크게 크게 기여하였다.

고구려시기의 첨성대터유적은 주체98(2009)년 4~5월기간에 평양시 대성구역 안학동에서 처음으로 조사발굴되였다.

새로 알려진 고구려첨성대터유적은 대성산 소문봉의 남쪽기슭에 있는 고구려왕궁성 안학궁성의 서문에서 서쪽으로 약 2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있다.

유적의 주변에서는 여러기의 고구려돌칸흙무덤들과 기와나 질그릇쪼각과 같은 고구려시기의 유물들이 적지 않게 알려졌다.

유적은 크게 돌과 회를 다져서 쌓은 4각형의 중심시설과 그 바깥을 둘러싼 7각형의 보조돌시설로 이루어져있다.

중심시설은 다시 가운데부분과 변두리부분으로 갈라볼수 있다.

가운데부분은 한변의 길이가 3.2m정도의 배가 나온 4각형으로 되였는데 맨아래에 자갈을 깔고 그 우에 숯과 회를 엇바꾸어 가면서 쌓아올린 특이한 구조를 이루었다.

변두리부분은 중심부분을 둘러싼 너비 2.1m정도의 4각틀모양인데 돌과 회를 섞어서 두텁게 올려쌓은 매우 견고한 기초시설로 되여있다.

7각형의 보조돌시설은 한변의 길이가 9.1~9.2m정도되게 7각형으로 돌을 쌓아올려 만든것이다. 이 시설에서는 바닥에 일정한 두께로 진흙을 다지고 그우에 돌을 2~3층 쌓아올린 다음 그 돌시설과 중심시설사이의 공간에 흙을 다져넣어 전반적으로 수평상태를 보장하였다.

유적의 방향은 서쪽으로 6.5°가량 치우친 남향으로서 거의나 정남향에 가깝다.

첨성대터유적은 고구려가 대성산일대에 수도를 정하고있던 시기(427~586년)에 축조되고 천체의 운동와 기후변화를 살피는데 리용된 기상천문관측시설이였다.

새로 발굴된 고구려의 첨성대터유적은 신라의 경주첨성대보다 시기적으로 200여년 앞섰고 구조상으로 서로 비슷하기때문에 천문학분야에서 고구려가 신라보다 훨씬 먼저 발전하였고 신라에 영향을 주었다는것을 실물자료로 확증할수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발굴된 고구려시기의 첨성대터는 동아시아지역에서 제일 이른 시기에 세워졌다고 볼수 있는 첨성대터유적이다.

이것은 조선민족이 일찍부터 발전되고 우수한 문화를 창조한 재능있는 민족이라는것을 증명해주고있다.

고구려첨성대터 근경
고구려첨성대터 근경
고구려첨성대터의 중심시설 기초
고구려첨성대터의 중심시설 기초
고구첨성대터의 중심시설 기초부분의 강자갈층
고구첨성대터의 중심시설 기초부분의 강자갈층
고구첨성대터의 중심시설 기초부분의 숯층
고구첨성대터의 중심시설 기초부분의 숯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