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주체적인 고고학발전의 첫걸음마를 떼여주시려고

 2024.10.31.

경애하는 김정은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민족유산을 주체적립장에서 계승발전시킬데 대한 정책을 제시하시고 력사에 묻혀있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새롭게 발굴고증하며 외래침략자들에 의하여 파괴된 유적들을 원상대로 복구개건하도록 이끄시여 선조들이 창조한 문화유산을 민족의 재보로 인민들과 후대들에게 안겨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선조들이 창조한 문화유산을 민족의 재보로 인민들과 후대들에게 안겨주시기 위하여 해방후 그처럼 어렵고 복잡한 속에서도 주체적인 고고학발전의 첫걸음마를 떼여주시려고 크나큰 로고와 심혈을 기울이시였다.

해방직후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고고학분야에서도 그것을 맡아 수행할수 있는 학자력량을 마련하는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나섰다.

당시 조선에는 조선력사를 전공한 학자도 몇명 되지 않았지만 고고학을 전문한 사람은 불과 한두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이런 조건에서 해방후 고고학자대렬을 꾸리는 사업은 주체적인 고고학건설의 선차적인 과업으로 나서지 않을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김일성종합대학에 민족사에 대한 교육과 과학발전을 떠메고나갈 학자력량을 마련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6년 8월 16일 자신의 명의로 된 교원위촉장을 몸소 보내시여 박시형, 김석형선생님들을 비롯한 력사학자, 고고학자들을 대학에 불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김일성종합대학에서 민족사교육을 강화하여 주체적인 고고학을 떠메고나갈 새로운 인재들을 키워내도록 하시였다.

창립당시 김일성종합대학에는 문학부에 력사를 전공하는 사학과가 있었다. 1년후인 1947년 9월 새학년도부터는 문학부가 력사문학부로 개칭되였다.

개학초기부터 존재한 사학과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에 의하여 조선력사학과목을 과정안에 반영하였으며 거기에 많은 시간을 배당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 로동계급의 정신으로 무장되고 새 조국의 문화건설에 참답게 이바지할수 있는 새 세대 지식인대렬이 튼튼히 꾸려지게 됨으로써 주체적인 고고학발전의 믿음직한 담보가 마련되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처음으로 진행하는 김일성종합대학 교원, 학생들의 력사유적발굴을 현지에서 지도해주시면서 앞으로 력사유적발굴과 연구에서 견지하여야 할 지침을 마련해주시였다.

1947년 6월부터 9월까지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력사문학부의 교원, 학생들은 학부에 꾸리는 고고학박물관에 필요한 자료를 보충하기 위하여 락랑무덤발굴사업을 진행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민주조선건설을 령도하시는 그처럼 바쁘신 속에서도 1947년 9월 17일 당시 중화군 류사리의 무덤유적발굴장을 찾아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귀중한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였다고 치하하시면서 력사를 연구하자면 고고학적자료들이 많아야 한다고, 이미 파낸 고분들의 유물들을 잘 보존하고 연구해보아야 하겠다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 발굴사업에서 교원들과 학생들이 수고가 많다고 치하하시면서 학생들을 이런 일에 참가시키는것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평가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김일성종합대학에서 력사유물들을 많이 확보하도록 하시여 력사교육과 연구를 위한 자료적인 토대를 튼튼히 마련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7년 10월 11일 김일성종합대학창립 1돐기념 전람회장을 돌아보시면서 종합대학에서는 조선력사에 대한 연구사업을 잘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선조들이 이룩해놓은 민족문화유산들을 더 많이 발굴수집할데 대하여 강조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높이 받들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는 수많은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수집정리하였다.

이 유물들은 1년후에 김일성종합대학 본청사에 꾸려진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여 실물교육에 이바지되였으며 1949년 9월에는 대학창립 3돐을 맞으면서 고고학박물관을 더욱 발전시킨 력사박물관에 옮겨졌다.

박물관에는 석기시대의 유물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귀중한 자료 3 500여점이 진렬되여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후 민족유산부문에 정연한 행정적인 기구체계와 직능을 세우도록 하시여 고고학을 국가적으로 발전시킬수 있는 담보를 마련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8년 10월 25일 중앙고적보존위원회가 행정적지도권능이 높지 못하고 문화유적과 유물에 대한 연구사업이나 력사박물관사업을 지도하지 못하게 되여있다고 하시면서 내각의 직속기관으로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를 내오도록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그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된 직후인 1948년 11월 1일 중앙고적보존위원회는 내각직속기구인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로 개편되여 이 사업을 더욱 힘있게 밀고나갈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7년 8월 17일 국립중앙력사박물관(당시)을 찾으시고 박물관일군들이 그동안 사업을 잘하였다고 치하하시면서 앞으로 이미 얻은 성과와 경험을 살려 력사유적과 유물들을 발굴하고 수집하는 사업을 계속 진행할데 대하여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 가르치심은 력사박물관들에서도 유적과 유물을 발굴하고 연구하는 사업을 진행함으로써 청소한 학자력량을 남김없이 동원할수 있게 한 현명한 방침이였다.

1949년 9월부터 10월사이에 청진력사박물관에서 진행된 라진초도원시유적발굴을 비롯하여 1949년 6월과 7월사이에 발굴된 안악 1호, 2호, 3호무덤발굴, 1950년 4월부터 5월사이에 진행한 궁산유적에 대한 발굴 등은 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세워주신 행정체계에 따라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당시)의 지도밑에 각 도 박물관들과 도의 조사보존기관들이 망라되여 성과적으로 진행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이처럼 세심한 가르치심과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해방후 조선고고학은 일제식민지통치의 후과를 청산하고 민족의 력사와 문화를 과학적으로 해명하는 참다운 학문으로 첫걸음을 떼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