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연구

우리 나라에 보존되여있는 금석문의 지역적분포상태와 특징

 2018.8.17.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민족이 지난날에 이루어놓은 훌륭한 문화유산을 적극 찾아내고 옳게 계승발전시켜야 인민들속에서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북돋아줄수 있고 민족문화도 개화발전시킬수 있습니다.》 (김정일전집》 제7권 273~274페지)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의 나날에 세상에 널리 자랑할만 한 많은 민족문화유산을 창조하여놓았다.

지난날의 민족문화유산가운데는 쇠붙이나 돌 같은데 새겨놓은 금석문도 있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쉽게 변화되거나 마모되지 않는 쇠붙이나 돌의 재질상특성을 리용하여 서사생활의 첫 시기부터 중세 전기간 금석문을 만들어왔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나라 전국각지에는 지난날에 이루어진 비석을 비롯한 금석문이 수많이 남아있게 되였다.

특히 우리 나라에는 우리 당의 훌륭한 민족문화유산보존시책에 의하여 과학리론적으로나 조형예술적으로 우수한 많은 금석문들이 국가적으로 보존관리되고있으며 이것은 우리 인민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주는데 적극 이바지하고있다.

이 글에서는 우리 나라에 보존되여있는 금석문의 분포상태와 지역별특징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우리 나라에 어떤 류형의 금석문이 어떻게 분포되여있고 매 지역별 분포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잘 아는것은 금석문에 대한 연구와 보존관리에서 선차적으로 나서는 중요한 문제의 하나이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주체78(1989)년 12월 1일 전국의 유적유물 특히 비문들을 전반적으로 조사장악하고 검토할데 대한 강령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고 나라의 방방곡곡을 답사하는 과정에 우리 나라에 보존되여있는 각종 금석문의 지역적분포상태와 특징, 그 사료적 및 조형예술적가치를 깊이있게 고증할수 있게 되였다.

일반적으로 금석문의 한 형태인 비석들은 사건, 사실 또는 개별적인물들과 가장 인연이 깊은 장소를 선택하여 세우는것이 하나의 보편적현상이다. 때문에 금석문의 분포상태는 금석문자체의 종류, 대상과 밀접히 련관되여있다.

실례로 어떤 력사적인 사건, 사실을 기록한 기공비, 순수비, 의렬비인 경우에는 사건이나 사실이 벌어진 바로 그 장소나 고장에 세운다.

그런가 하면 릉비는 주로 력대 임금들의 릉에 세워지며 묘비는 무덤주인공이 죽은 곳에 세워지게 된다.

또 범종이나 사찰비, 탑비, 돌탑 등은 절간이나 절터에 세워지며 성곽비, 서원비 등은 성이나 서원에 세워진다.

이처럼 금석문인 비석들은 사건, 사실 또는 개별적인물들과 가장 인연이 있는 곳에 세워지는것만큼 비석들의 종류에 따라 세워지는 위치가 대체로 규정되여있다.

현재 우리 나라의 모든지역에는 거의 200여개의 금석문들이 분포되여 보존되여있다.

금석문이 가장 많이 보전되여있는 곳은 평양일대와 개성일대, 평안북도, 함경북도, 황해남도지역이다.

우리 나라 금석문의 지역별분포상태를 분석해보면 일련의 특징을 찾아볼수 있다.

평양시에는 근 20개의 금석문이 분포되여 보존되고있다.

평양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고 고구려의 도읍지였으며 고려와 조선봉건왕조시기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시되던 곳이였다.

평양에 있는 금석문의 특징은 우선 오랜 도읍지로서 우리 민족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전통을 보여주는 금석문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것이다.

우리 민족국가의 첫 시조인 단군과 고구려의 시조왕 동명왕의 무덤에 세워진 릉비와 평양성돌석각들은 평양의 력사가 매우 유구함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 6세기에 평양성을 수축한 과정을 보여주는 평양성돌석각에는 고구려에서 평양성을 쌓은 정형에 대한 자료가 반영되여있으며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초기에 건립되였던 광법사에는 이 절간의 오랜 연혁을 보여주는 광법사사적비 등이 세워져있어 평양이 고구려의 오랜 수도로서의 력사적지위와 문화를 잘 보여준다.

평양에 있는 금석문의 특징은 또한 다른 지역들보다 금석문의 종류가 다양한것이다.

금석문에는 금문과 석문이 있는데 금문으로서 종과 현자포명문이 있고 석문으로서 석각과 비석이 있으며 비석에도 릉비, 의렬비, 사찰비, 교량비 등이 있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평양종에 새긴 글은 종을 만든 경위와 과정을 밝힌 금문이며 평양성돌석각은 고구려시기 평양에 성곽을 새로 수축하였던 과정을 기록해놓은 석문이다.

강동군과 력포구역에 세운 단군과 동명왕의 릉의 릉비는 우리 민족의 오랜 력사와 문화전통을 가지고있으며 주체72(1983)년에 대동강기슭에서 발굴한 현자포명문은 17세기 발전된 군사과학기술과 무기제작기술의 면모를 보여주는 금문으로 알려져있다.

이 명문에 의하면 포의 종류와 제작년대, 포를 만든 사람의 이름, 포의 무게 등이 새겨져있다.

그리고 광법사사적비, 광법사중수단청비, 광법사시왕개소상비는 대성산에 건립되였던 광법사의 연혁과 보수과정을 보여주는 사찰비이다.

이밖에 보통교를 세운 과정을 새겨놓은 보통교실적비와 평양성의 관문이였던 대동문을 보수한 정형을 기록한 대동문중수비도 평양에 있는 대표적비석들이다.

이처럼 평양과 그 부근에 오랜 력사적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다양한 금석문이 분포되여있는것은 다른 지방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평안북도에는 40개의 금석문이 분포되여있다.

평안북도에 분포되여있는 비석들은 크게 두가지 양상을 띠고있는데 그 하나는 우리 인민의 반침략투쟁사실을 증빙하여주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기 절간과 중들의 생활을 반영한것이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은것이 특징적이다.

평안북도에 분포되여있는 금석문들에는 우선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투쟁사실을 기록한 비석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것이 특징적이다.

이 지역에는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투쟁사실을 기록한 비석들이 전체 비석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것은 이 지역이 지난날 우리 나라의 서북방국경지대로서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이 빈번하던 곳이였기때문이다.

그러므로 력사적으로 다른 지역보다 외적의 침략을 자주 받았으며 그것을 막기 위한 반침략애국투쟁과 성곽건축공사에 많은 힘을 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평안북도에는 이 시기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희생성과 용감성을 발휘한 애국적인민들과 개별적인물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비석들과 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주요하게 리용되였던 여러 성곽들에 대하여 기록한 비석들이 많다.

반침략투쟁사실을 기록한 비석 13개와 성곽건축공사과정을 기록한 비석 7개가 분포되여있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것은 정봉수승전비, 정봉수신도비, 정기수묘갈명, 리개립비, 삼십륙의사비이다. 이 비석들은 다 1627년과 1636년에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인민들과 의병장들의 투쟁사실을 기록한것이다.

그리고 녕변읍에 있는 철옹성비, 염주군 반곡리의 룡골산성개축비, 정주시의 정주성개축비와 정주성성첩중수비, 철산군의 운암산성수축비, 동림군의 검산성수축비, 검산성중수비는 다 성을 처음 쌓거나 보수한 사실과 성안에 각종 무기와 시설물들을 설치하였던 사실을 기록하고있다.

이러한 비석들은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사를 연구하는데 자료적으로 의의가 있다.

평안북도에 분포되여있는 금석문들로는 또한 불교관계비석들이 적지 않게 보존되여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이 지방에 불교관계비석들이 많은것은 예로부터 절승경개를 이룬 명승지인 묘향산이 있기때문이다.

불교가 우리 나라에 들어온 후 수많은 절간들이 세워졌는데 그것들은 다 산천이 수려하고 경치좋은 곳들에 있었다.

묘향산은 경치가 아름다운 명승지인것으로 하여 일찍부터 절간이 세워졌으며 불교문화의 보급지로 되였다.

묘향산에 자리잡은 보현사와 그밖의 건축물들은 우리 나라 중세문화의 높은 발전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문화유산들이다.

고려시기에 세워진 보현사는 력대로 서산대사를 비롯한 이름난 중들이 많이 거처하던 곳이므로 부도와 비석들이 적지 않다.

현재 묘향산 보현사와 그 주변에는 보현사비, 보현사사적기, 보현사중건비, 보현사불향답비, 보현사 령산전불향답비, 수충사비, 안심사석종비등 보현사와 관련한 비석들과 청허당비, 벽허대사비, 운파대사비를 비롯하여 개별적중들의 비석이 남아있다.

이러한 비석들에도 당시 우리 민족의 생활자료가 일정하게 반영되여있다.

특히 보현사비에는 묘향산에 절간을 세운 과정과 그 보수정형이 기록되여있으며 중세 절간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여러가지 생활자료들이 기록되여있다.

평안남도와 남포시에도 여러개의 금석문이 보존되여있다.

이 지역에 있는 비석들은 대체로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쳐 싸운 개별적인물들의 투쟁사실을 담고있다.

안주시에 있는 충민사비는 1627년 후금의 침입때 안주성에서 적들과 싸우다 희생된 남이홍을 비롯한 장수들의 공적을 기록하여 세운것이다. 남포시에 있는 김응서묘비, 김응서신도비는 임진조국전쟁시기 김응서의 투쟁사실과 그의 일생을 기록한것이다.

함경북도에는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많은 금석문들이 보존되여있다.

이 일대에 분포된 금석문은 국경방비를 강화하고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투쟁에서 용맹을 떨친 우리 인민들의 투쟁사실을 전해주는 비석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것이 특징적이다.

이 지역은 나라의 북쪽변방으로서 수시로 침략자들의 침입을 받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많은 인적 및 물질적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은 지역상 특성으로 하여 이 지방 인민들은 침략자들을 물리치고 나라의 변방을 지켜 싸우려는 애국심이 남달리 강하였다.

함경북도일대 인민들은 유리한 지형조건을 리용하여 여러가지 군사적요새를 튼튼히 꾸리였으며 평소에는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반영된 자료를 보더라도 전국의 성곽 797개(당시 쓰던 성과 페허로 된 성을 포함)가운데 170개가 이 지역에 있다는 사실은 이 지역 인민들이 나라방비에 기울인 힘겹고도 피타는 노력에 대하여 말하여준다.

함경북도에 분포되여있는 비석들가운데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의병장들과 인민들의 투쟁을 기록한 북관대첩비, 숭렬서원유허비, 창렬사유허비, 모의사비, 리붕수신도비, 김덕령묘비 등이 있다.

그리고 녀진족의 침입을 반대하여 싸운 인민들의 투쟁을 보여주는 원수대비, 윤관사당비, 승전대비, 신립비가 있다.

또한 김종서추모비, 황보인기적비, 맹호남기공비등은 4군6진의 개척과 국경방비에 공적을 세운 인물들을 기록한 비석들이다.

이처럼 함경북도안의 비석들은 절대다수가 우리 인민들이 력대로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고 북부국경방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투쟁한 사실을 기록한 금석문들이 많은것이 특징적이다.

함경남도에는 10여개의 비석이 분포되여있는데 함경북도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외래침략자들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사람들의 투쟁사실을 기록한것들이다.

그러한 비석들로서는 창의사비, 륙충사사단비, 서덕린행적비, 박원량신도비, 리유일묘비 등이 있는데 이러한 비석들에는 임진조국전쟁시기 애국적의병장들과 광범한 인민들이 이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벌린 사실이 기록되여있다.

북청의 시중대비, 단천의 장사대비는 북방오랑캐들을 물리쳐 싸운 사실을 보여주고있다.

함경남도에는 이밖에 진흥왕순수비의 일부인 황초령비와 마운령비가 있는데 이것은 세나라시기의 력사연구에 일정한 참고로 되고있다.

함경남도에 분포되여있는 비석들은 대부분이 외래침략자들을 물리치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평범한 인민들의 투쟁사실을 전하는것으로 특징적이다.

황해남도에는 30여개의 금석문이 분포되여있다. 그것들은 주로 절간들에 집중되여있으며 그밖에 개별적인물들과 관련한 비석들도 있다.

절간비석들은 이 지역에서 과반수를 차지한다.

황해남도는 예로부터 신광사, 강서사, 연등사, 영귀사, 수충사, 학서사를 비롯한 많은 절간들이 있었는데 이 사찰들에는 그것이 세워지게 된 경위와 래력을 기록한 비석들이 적지 않게 지금도 남아있다.

이러한 절간들에 절간비들과 개별적인 중들의 비석들이 세워져있다.

고려시기에 세워진 《진철대사비》를 비롯한 사찰비들과 탑비들은 다 불교와 관련한 유물들이지만 해당 시기의 력사와 문화를 연구하는데 일정하게 도움을 준다.

황해남도에는 개별적인물들의 사적과 관련한 비석들도 있다.

그러한 비석으로는 고려태조 왕건의 신하였던 신숭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 그 대표적실례로 된다.

또한 16세기 이름난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률곡 리이와 관련한 비석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리이는 이름있는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였으나 당파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벽성에 내려와 소현서원에서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썼다.

그가 죽은 후 200여년이 지나서 소현서원에 여러개의 비석을 세웠다.

이밖에도 리희건, 오여상, 신응시, 류차달 등의 무덤에 세운 묘비와 신도비가 있다.

황해남도에 분포되여있는 금석문들은 대다수가 절간비와 개별적사람들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들이 세워져있는것이 특징적이다.

황해북도에는 20여개의 비석이 있는데 그 특징은 황해남도와 비슷하다. 대표적인 비석들로는 성불사사적비, 심원사사적비, 귀진사사적비, 안국사사적비 등 사찰비들과 개별적인 중들의 비석과 한석봉, 원삼숭, 리수방 등 개별적인 인물들의 묘비들이 있다.

이밖에도 태백산성의 수축정형을 기록한 성지수축비, 태백산성석각이 남아있다.

강원도에 보존되여있는 금석문들로는 불교관계비석들이 다른 지역보다 많은것이 특징적이다.

강원도에는 예로부터 천하절승으로 알려진 금강산을 비롯한 명승지들이 있어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혹된 불교승려들은 곳곳에 절간을 세웠다. 그리고는 절간들에 사적비를 세웠다. 뿐아니라 오랜 중들이 죽으면 탑비들을 만들어 세웠다.

그로부터 이 지역에는 금석문의 90%가 불교관계비석이다.

대표적인 비석으로 지난 임진조국전쟁시기 5 000여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왜적을 물리치는 싸움에 참가하였던 애국적인 승병장 서산대사의 투쟁을 기록한 《청허당비》가 내금강에 보존되여있으며 그의 제자들의 비석이 여러개가 있다.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시에는 40여개의 금석문이 보존되여있다.

개성일대에 분포되여있는 금석문들로는 고려시기 력사적사실과 조형예술적으로 우수한 걸작품으로 될수 있는 비석들이 많은것이 특징적이다.

고려시기의 비석들로 현화사비, 령통사대각국사비, 오룡사법경대사비, 광통보제선사비들이 있다.

이 비들은 사료적가치로 보나 조형예술적측면에서 우수한 걸작품이 된다.

또한 개성일대에는 여러 류형의 금석문이 량적으로 많이 분포되여 보존되여있는것이 특징적이다.

개성에는 릉비와 묘비, 신도비, 서원비, 송덕비, 사당비, 의렬비, 사찰비, 종명, 돌탑, 석각 등 각이한 종류의 금석문들이 다 있다.

그가운데서 대표적인 금석문들로는 왕건왕릉에 세워진 현릉묘표, 현릉수개기실비, 서경덕의 사적을 기록한 서경덕신도비, 정몽주의 사적을 기록한 표충비, 선죽교비, 정몽주서원비, 연복사종명, 대흥산성석각 등이 오늘날까지 원상그대로 보존되여있다.

자강도에는 위원읍축성비, 법왕대비, 안교묵비가 있으며 량강도에는 후주성축성비, 백두산천지비가 남아있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 분포되여 보존되여있는 금석문은 지역별로 일련의 특징이 있다. 다시말하여 우리 민족의 오랜 수도였던 평양과 개성에는 해당 시대의 력사를 보여주는 금석문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전해지는것이 특징이며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일대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고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지켜 싸운 우리 인민의 반침략애국투쟁사실을 기록한 금석문이 많고 강원도와 황해남북도에는 절간유적이 많은데 맞게 불교관계비석들이 많이 분포되여있는것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금석문들은 담고있는 내용과 조형예술적가치로 하여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적재보로 오랜 세월 귀중히 보존되여오는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