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국영웅 김성진동무는 주체39(1950)년 7월에 인민군대에 입대하여 주체40(1951)년 2월 수리산방어전투에서 용감히 싸웠으며 주체42(1953)년 1월 9일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565. 7고지습격전투에서 적화구를 가슴으로 막아 중대의 돌격로를 열어놓았다. 그의 가슴으로 11발의 중기총탄이 뚫고나가면서 파헤친 상처가 매우 참혹하였으나 심장은 살아있었다.
적화구를 막은 전사가 살아있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그러면 영웅의 이러한 기적적인 사실이 누구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진것인가.
그 주인공은 다름아닌 《민주조선》사의 종군기자였던 윤창우동무였다.
위대한 령도자
《종군기자정신은 한손에는 붓을 들고 다른 한손에는 총을 들고 최고사령부를 목숨바쳐 옹호보위하는 결사옹위정신이며 그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도 보도전투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는 결사집행정신입니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쟁개시와 함께 종군의 길에 올랐던 윤창우동무는 우리 인민군대의 영웅적인 금강도하전투와 대전해방전투에 참가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락동강을 넘어가는 전사들을 따라가면서 전선보도기사를 썼고 진지방어전시기에는 1211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쟁 전기간 전선동부에서 종군활동을 하면서 많은 전투기를 집필하였다.
윤창우동무가 전쟁기간 쓴 기사는 무려 700여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 25건은 위대한
주체42(1953)년 1월경 윤창우동무는 적기의 나팜탄에 얼굴과 온 몸에 화상을 입고 눈수술까지 하고 야전병원 안과병동의 침대에 누워있으면서도 부상병들을 불러들여 적들이 아이젠하워의 《신공세》의 서막으로 떠들던 《정형고지》작전을 우리 방위자들이 어떻게 보기좋게 파탄시켰는가에 대한 전투상보를 써서 신문에 발표하였다.
그 다음날 그는 또 하나의 희한한 감동적인 소식을 듣게 되였다. 자기의 몸으로 적의 중기화구를 막고도 살아난 전사가 외과병동에 실려와 치료를 받고있다는것이였다. 그가 바로 김성진동무였다.
윤창우동무는 그냥 침대에 누워있을수 없었다. 외과병동은 거기에서 10리 남짓한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김성진동무를 직접 만나 취재하기로 결심하였다.
결국 담당군의와 간호원이 그를 담가에 태우고 외과병동으로 데려갔다.
윤창우동무는 김성진동무의 침대 바로 옆에 자리잡고 그의 손목을 꼭 쥔채 취재를 하였으며 전날처럼 담당간호원에게 불러주면서 대필을 시킨 다음 원고를 지체없이 보내여 신문에 인차 보도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김성진동무가 발휘한 영웅적위훈이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였다.
이러한 감동적인 사실에 대하여 로씨야 모스크바국립건설종합대학기관지 《건설인재》 전 책임주필이며 《근로하는 로씨야》운동 성원인 나딸리야 벨로꼬삐또바는 《천출명장
《한 육탄영웅과 그를 취재한 종군기자에 대한 이야기도 떠오른다. 적의 중기화점을 가슴으로 막고 진격로를 연 영웅은 가슴에 11발의 총탄을 맞고 살아남은 영웅이였다.
그런데 눈과 얼굴에 중상을 입고 온통 붕대를 감고있는 한 종군기자가 이 육탄영웅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였다 한다. 종군기자는 전혀 볼수 없는 형편이였지만 또 담가에 실린 몸이였지만 끝내 영웅을 취재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쏘도전쟁시기 쏘련의 많은 기자들이 종군활동을 하였다. 일리야 에렌브르그가 종군하여 쓴 글을 보고 그의 <글마디들의 신랄성은 까츄샤의 일체사격과 같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조선기자의 위훈은 어떻게 격찬하여야 할것인가.
중상당한 기자가 눈과 얼굴을 온통 붕대로 감은채 불사신의 영웅을 취재하여 병사들과 인민들을 크게 고무한것도 싸우는 조선의 기상이고 기적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종군기자 윤창우동무가 발휘한 이러한 취재집필활동정신은 그 어떤 불리한 조건과 환경에서도 맡은 보도전투임무를 끝까지 수행하는 결사집행정신이 낳은 고귀한 산물이며 이것은 우리 조선의 종군기자들만이 발휘할수 있는 사상정신력의 정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