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은 그 모습이 아주 웅장하여 예로부터 우리 나라에서 명산으로 불리워왔습니다. 백두산은 우리 인민의 커다란 자랑이며 조선사람은 누구나 다 백두산에 올라가보아야 합니다.》 (
명산중의 명산인 백두산에는 력사발전의 매 시기마다 민족의 넋과 념원이 깃든 조종의 성산을 개척하기 위한 우리 선조들의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탐험과 탐승의 력사가 깃들어있다.
일찌기 백두산일대에서 원시문화를 꽃피여온 우리 선조들은 이미 우리 나라의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시기부터 백두산에 대한 탐험을 시작하였다.
중국의 옛 문헌인 《산해경》(B.C. 5~B.C. 3세기경 편찬) 제14 대황동경조에서 《대황중에 불함산이라는 산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이 고조선의 령역안에 있다고 기록한것은 고조선사람들이 자기 령토의 중심에 우뚝 솟은 민족사의 발상지 백두산을 성산으로 떠받들며 그에 대한 탐험활동을 진행한것으로 하여 그것이 이웃지역까지 알려지고 문헌에도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우리 나라의 첫 봉건국가였던 고구려에서도 백두산을 역시 자기 왕조의 발상지로 여기며 성산에 대한 탐험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도태산(백두산-역주)이 있는데 이 산에 범, 표범, 곰, 이리들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더러운것을 버리지 않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물건을 많이 쌓아두고 간다.》라고 한《위서》(권100 렬전 88 물길조)의 옛 기록은 고구려사람들이 성산인 백두산에 올라 몸가짐을 삼가하고 제사를 성의를 담아 진행하였을뿐아니라 탐험활동을 통하여 명산의 동식물들에 대한 지식도 넓혀나갔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에도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을 반드시 올라야 하는 성산으로 간주하며 탐험을 진행하였다.
그 이후 력사기록인 고려사의 왕실세계에서는 고려의 태조 왕건의 5대조상인 호경도 고구려유민출신으로서 성골
후기신라말기 동리산(전라남도 곡성)의 조사(우두머리중)인 도선이 876년경에 다른 나라로부터 귀국하면서 제일먼저 백두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았으며 개성의 송악산에 이르러 백두산줄기가 머무른 곳이라고 왕건의 조상들에게 말해준 사실 등은 백두산이 후기신라사람들속에서 반드시 올라야 할 성산으로 되여있었고 또 그러한 인식에 기초한 탐험활동이 널리 진행되였다는것을 알수 있게 한다.
백두산탐험은 우리 나라의 첫 통일국가였던 고려시기에도 계속되였다.
1107년 나라의 동북부지역을 되찾기 위한 9성개척을 비롯하여 외래침략세력을 반대하는 투쟁과 자연을 개조하기 위한 창조적활동을 벌리는 과정에 백두산에 대한 탐험을 진행하였으며 그러한 우리 인민들의 사상감정을 정몽주, 리색 등이 자기들의 시조에 담아 전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백두산탐험은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들어와 더욱 적극화되였다.
조선봉건왕조전반기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에 올라 그에 대한 탐험을 진행하고 관측자료도 기록으로 남기였다.
조선봉건왕조초기의 력사지리자료들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이전부터 진행하던 백두산탐험을 이 시기에 와서 활발히 진행하였음을 알수 있다.
1432년에 윤회, 신색이 편찬한 《세종실록》지리지 갑산부조에는 《영가사오리에서 서쪽으로 60리가면 백두산이 있다. 산은 모두 3개의 층으로 되여있고 꼭대기에는 큰 못이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두단강(두만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 소하강(송화강)이 되며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서쪽으로 흘러 흑룡강이 된다. 그 산에 있는 새와 짐승들은 전부 흰색이며 산중턱이상에는 전부 부석이 있다.》라고 되여있다.
1481년에 량성지, 류성룡이 편찬한《동국여지승람》 갑산부조에는 백두산이 고을로부터 330리되는 곳에 있다는것과 백두산방향으로 가면서 설치된 보루와 봉수들, 백두산에서 압록강이 시작되는 곳인 마죽동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1530년에 리행 등이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회령부조에는 우의 내용과 함께 고을로부터 서쪽으로 7~8일되는 거리에 백두산이 있으며 천지의 둘레가 80리라는 내용이 보충적으로 올라있다.
백두산에 대하여 이 정도의 지리적인식을 가지자면 한두명이 아니라 일정한 수의 사람들이 여러차례에 걸쳐 올라가야 한다.
또한 최근에 백두산천지호반의 향도봉소분지에서 발굴한 제단유적과 그와 관련한 두개의 금석문도 조선봉건왕조전반기 우리 선조들의 이곳을 탐승하고 진행한 다양한 제사활동의 흔적을 말해주고있다.
조선봉건왕조 전반기에도 그러하였지만 특히 조선봉건왕조 후반기 백두산의 자연지리를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거나 숭엄한 산세를 관망하기 위한 답사나 탐승, 탐험이 활발히 벌어지고 전문적인 등산로정도 개척되였다.
1712년 5월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위한 일행이 5월 6일에 괘궁정에서 떠나 5월 11일에 백두산마루에 도착하여 답사로정을 마쳤다. 이때 서민출신의 문인인 홍세태(1653-1725년)가 일행을 따라 산마루에 올라 천지를 부감하고 기행문 《백두산기》를 썼다.
18세기 전반기 문인인 김진상(1684-?)도 1722~1724년사이에 백두산을 탐승하고 시 《백두산절정에 올라》를 지어 백두산의 기묘한 절승을 노래하였고 18세기 중엽의 문인인 조영순(1725-1775년)도 1762년 종성부사로 있던 시기 백두산을 탐승하고 여러편의 시들을 지었다.
같은 시대의 문인인 박종(1735-1793년)도 1764년에 경성군수와 같이 백두산을 탐승하고 기행문《백두산기행》을 저술하였으며 18세기 후반기의 문인 서명응(1735-1787년)은 1766년 갑산에서 류배살이를 할 때 백두산을 탐승하고 시와 함께 기행문 《백두산유람기》를 창작하였다.
문인들의 이러한 탐승보다도 백두산에 더 많이 올랐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백두의 원시림과 계곡을 주름잡듯하며 창조적로동을 벌려온 근로인민대중이였다.
무산포수 한치익과 갑산포수 송태선을 비롯한 백두산부근의 포수들과 종성의 향리 전통성과 같은 길잡이군들에 의하여 백두산에로 오르는 안전하고 편리한 등산로정이 개척되여 백두산이 자기의 숭엄한 경관을 더더욱 자랑할수 있게 되였다.
여러 기행문들에 소개된 조선봉건왕조 후반기 백두산등산길은 크게 세갈래길로 되여있었다고 볼수 있다.
홍세태의 《백두산기》에 의하면 1712년에 올랐던 등산로정은 백두산서남쪽 혜산의 괘궁정에서 떠나 오시천(운흥-혜산)을 건너 보천의 곤장덕을 거쳐 포태를 지나 삼지연에 이르며 소백산을 거쳐 소연지봉, 대연지봉을 지나 백두산마루에 오르는 길이였다.
박종의 《백두산기행》에 의하면 1764년의 등산로정은 백두산동쪽 무산에서 출발하여 두만강연안을 거슬러올라 림강리(무산군), 삼장리(연사군)를 거쳐 서두수물곬을 따라 로평리(연사군)까지 갔으며 대홍단벌을 가로질러 북포태산기슭을 지나 삼지연에 이르고 소백산을 거쳐 백두산천지에 오르는 길이였다.
서명응의 《백두산유람기》에 의하면 1766년 그가 올랐던 등산로정은 혜산과 무산의 중간지점이라고 할수 있는 갑산에서 출발하여 허천강을 건너 운총진에 이르고 오시천을 건너 홍세태가 걸은 로정과 같은 길을 밟아 백두산절정에 오르는 길이였다.
세갈래의 등산로정의 출발지는 혜산, 무산, 갑산 등으로 서로 다르나 삼지연으로부터 백두산마루까지의 등산길은 대체로 같았다.
이러한 로정뿐아니라 인민들의 적극적인 창조적활동에 의하여 여러갈래의 길이 개척되여있었을것은 명백하다.
특히 애국적인 지리학자 김정호(?~1864년)에 의하여 진행된 백두산탐험과 조사는 백두산탐험에서 새로운 전진을 가져왔다.
김정호는 1835년부터 1861년사이에 무려 두차례나 백두산을 탐험하고 백두산일대의 지형을 독특한 묘사수법에 기초하여 지도화함으로써 조종의 산으로서의 백두산의 면모를 그려냈으며 백두산의 경관을 상세히 서술하여 세상에 내놓아 우리 나라의 문화적재보를 풍부히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근대에 이르러 일제의 강도적인 조선침략책동으로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하고있던 암담한 시기에도 우리 인민들은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으로, 희망의 등대로 바라보며 탐험과 등산활동을 줄기차게 벌려나갔다.
1921년 7~8월에 동아일보사의 주최밑에 청년학생들로 조직된 백두산등산대는 민족의 성산을 탐험하고 그것을 사회에 널리 선전하는 애국적활동을 힘차게 전개하였다.
《동아일보》 1921년 8월 6일부에서는 《우리 민족의 발상지-신화전설의 백두산에》라는 표제밑에 본사특파원과 사진반의 경성출발소식을 전하였으며 그 이후 8월 21일부에서는 16일 백두산상봉에 도착한 등산대의 감격적인 소식을, 8월 29일에는 등산대의 백두산천지를 촬영한 사진과 함께 등산대의 강연소식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하였다.
이밖에도 1926년 7~8월 조선교육회에서 주최한 백두산등산대활동을 비롯하여 근대시기 백두산탐험과 등산활동은 매우 활발히 벌어졌다.
일제의 악랄한 민족성말살책동속에서도 진보적인 청년학생들, 애국직지식인, 문인들은 모진 곤난을 극복하고 백두산에로의 탐험을 단행하면서 그와 관련한 도서들을 수많이 출판하였다.
《백두산상의 호수》(1896년), 《백두산탐험기》(1914년), 《백두산 식물조사서》(1918년), 《백두산과 백두화산맥》(1926년), 《백두산등산일기》(1927년), 《백두산행기》(1927년), 《백두산등척기》(1931년), 《백두산지방동물채집기》(1934년), 《백두산에로의 사진려행》(1935년) 등 수십여건의 백두산탐험, 자연과 관련한 도서들은 당시 백두산탐험과 등산이 종전의 일반적지형조사나 자연경관부감의 단계를 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학술적조사위주의 과학적탐험단계로 발전하였다는것을 립증해주고있는것과 함께 백두산탐험이 백두산에 올라 조국해방을 기원하던 우리 인민들의 민족적감정을 대변한 의의있고 애국적인 활동이라는것을 말해주고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진취적인 백두산탐험은 조종의 산, 민족의 성산을 더 깊이 알고 민족정기를 고수하기 위한 인민들의 적극적인 활동의 발현으로서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