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골부채는 더울 때 부채질을 하여도 좋고 앉을 때 깔개로 리용하여도 좋습니다.》 (
우리 인민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이 깃들어있는 부채는 예술성과 실용성이 결합된 하나의 기호품으로서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품으로 널리 리용되여왔다.
우리 나라에서 부채리용풍습은 오랜 력사를 가지고있다.
고대 진국의 유적으로 인정되고있는 경상남도 의창군 다호리의 옛 무덤에서 나온 2개의 깃털부채자루가운데서 큰 부채자루는 길이가 33.6㎝, 머리부분의 폭은 9.6㎝이며 머리부분에 직경 5㎜, 깊이 1㎝ 되는 구멍 12개(깃털을 꽂았던 부분)가 있었다. 그리고 작은 부채자루는 그보다 보존상태가 좋지 못한 상태에서 나타나있었다.
이 유물은 고대에 우리 인민들속에서 부채를 만들어 리용하는 풍습이 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부채는 중세초기인 세나라시기에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리용되였다.
세나라시기 고구려 고국원왕릉벽화의 무덤주인공이 쥐고있는 부채와 덕흥리무덤벽화에 그려진 무덤주인공이 쥐고있는 부채는 형태상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모두 깃털모양으로 되여있고 다양한 색갈로 되여있었다.
이것은 고대에 이어 4세기에도 우수한 깃털부채가 제작되고있었으며 그것은 주로 신분이 높은 귀족들속에서 리용된것임을 알수 있게 한다.
발해 및 후기신라시기에도 여전히 깃털달린 자루부채가 기본으로 되여있었는데 920년에 후백제왕 견훤이 공작새의 꼬리털을 리용하여 아름답고 섬세하게 장식하여 만든 단선(둥근부채)을 고려국가를 세운 왕건에게 보냈다는것은 이 시기에도 부채가 사람들의 생활에서 하나의 기호품으로 리용되고있었다는것을 보여준다.
고려시기 우리 인민들은 앞선 시기부터 전해오는 자루부채를 더한층 발전시켜나가는 한편 접이부채를 새롭게 창안제작하여 발전시켰다.
고려시기에 만들어진 접이부채가운데서 손꼽히는것은 백습선, 고려지선, 삼선, 비단선 등이였고 자루부채로는 송선이 있었다.
고려시기의 접이부채에 대하여 1123년에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사람 서긍은 《고려사람들은 한겨울에도 부채를 들고다니는데 접었다 폈다하는 신기한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송나라의 이름있던 문인들인 황정견, 공성지 등도 고려부채의 제작기교와 아름다움을 《하늘의 재주》에 의한것으로 찬양하면서 부채그림들에서 고려풍습을 자기 눈으로 보는것 같다고 감동하여 시를 읊었다.
자루부채인 송선 역시 소나무의 어린 가지를 잘게 잘라서 실오리처럼 만들어 두드려서 실을 낳은 다음 천을 짜듯이 짜서 만들었는데 우에는 꽃무늬를 놓아 매우 부드러운것이 특징적이였다.
고려의 발전된 부채는 조선봉건왕조시기 더욱더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리용되였다.
이 시기 접이부채의 종류와 형태를 보면 부채살의 재료에 따라 얇은 대껍질을 맞붙여 만든 합죽선, 마디있는 참대로 만든 죽절선, 검은 반점이 있는 참대로 만든 반죽선, 참대, 나무, 소뼈 세가지 재료를 맞붙여 만든 삼대선, 참대와 나무 두가지 재료를 맞붙여 만든 이대선 등이 있었고 접이부채의 손잡이에 매단 드림장식에 따라 목선초(침향, 고향목, 자단 등으로 여러가지 물형을 새긴것), 우선초(비취옥, 자만옥, 백옥, 수만옥 등으로 만든것), 밀화선초(밀화, 호박 등으로 만든것), 북향선초(향목가루를 이겨 만들고 거기에 무늬를 새기고 금박한것), 목실선초(나무열매의 씨로 만든것)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접이부채에 쓰인 종이와 천, 그림, 부채에 매단 드림장식들은 조선부채의 고유한 특성을 잘 나타내고있었다.
특히 전라도 전주와 남평에서 생산된 부채가 유명하였다.
접이부채뿐아니라 자루부채의 종류와 형태 역시 여러가지였다.
자루부채의 종류를 보면 곱장선, 오엽선, 련엽선, 지우선, 초엽선, 막부채, 디림부채, 진주선, 모선, 우선, 공작선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곱장선은 살붙임이 묘하고 오엽선, 련엽선, 지우선은 형태가 기이하며 초엽선(파초선)은 점잖은 맛이 나며 막부채는 든든하여 이름있었고 디림부채는 만들기 쉬운 특징을 가지고있었다. 그리고 진주선은 구슬로 장식한 의례용부채이고 모선은 털부채, 우선은 새나래, 공작선은 공작새꼬리털로 만든것이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채를 우리 인민들은 생활의 여러분야에 실리있게 리용하면서 하나의 기호품으로 가지고다니였다.
우선 부채에 그려진 글씨와 그림을 감상하면서 리용하였다.
접이부채들에는 글씨와 그림들이 그려진 부채가 많은데 이렇게 함으로써 부채질과 동시에 시와 그림을 함께 감상할수 있게 하였다.
이와 함께 우리 인민들은 부채에 이름있는 화가들의 그림이나 글씨를 써 받아가지고 친구간의 기념품으로 여기기도 하였으며 그림이나 글씨를 쓴 부채면종이만을 따로 떼내여 액자나 족자로 표구하여 감상하기도 하였다.
또한 부채는 우리 인민들의 일상생활에서 항상 갖추고 리용하는 기호품으로 리용되였다.
여기에서 자루부채는 주로 집안에서 부녀자들이 사용하였고 접이부채는 남자들이 외출할 때 리용하였으므로 이것을 《쥘부채》라고도 하였다. 즉 옷차림을 모두 갖추고 마지막에 부채를 들어야 비로소 외출할수 있었던것이다.
부채는 여름뿐아니라 겨울에도 들고다니였는데 찬바람이나 먼지가 날 때 얼굴을 막기도 하고 혹은 만나서 거북한 상대라도 부딪치게 될것 같으면 외면하지 않고 자연스레 부채로 얼굴을 가리우기도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의 그림인 《씨름》(김홍도)에 씨름군을 중심에 놓고 그 주위에서 물건을 파는 장사군과 함께 부채로 얼굴을 가리우고 승부를 가슴조이며 지켜보는 선비가 생동하게 형상되여있는것은 부채의 다양한 쓰임에 대하여 잘 알수 있게 한다.
또한 부채는 농업생산활동과 가정생활, 일상생활에도 효과적으로 리용되였다.
18세기 작가미상의 《농촌생활도》에서는 낟알털기가 한창인 마당에서 털어낸 낟알속에서 검불과 티를 없애기 위하여 한 농부가 드림부채를 손에 들고있는 모습이 보이고있다. 또한 부채들중에는 집안에 걸어두고 줄을 당겨 바람을 일구게 한 부채도 있었고 숯불을 피울 때나 숯불을 사용하는 다리미질을 할 때를 비롯하여 년중 어느때나 사용할수 있게 한것도 있으며 겨울철에도 부채를 휴대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혼례때는 얼굴의 눈아래부분을 가리우기 위한 얼굴가림용으로서 계절에 구애됨이 없이 부채를 사용하였다.
또한 부채는 예술활동에도 효과적으로 리용되였다.
지난날 광대들이 무대에서 소리를 할 때 그리고 재인들이 줄우에서 줄을 탈 때에는 언제나 부채를 사용하였으며 15~16세기 사당들의 춤인 《승무》, 봉산탈춤, 사당춤 등에서 부채는 출연자들의 소도구로 리용되였다.
또한 부채는 하나의 치레거리로 갖추어지고 리용되였으며 부채색도 경우에 맞게 선택하고 리용하였다.
부채가 고급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그에 맞는 여러가지 공예적장식이 이루어진것은 이것이 하나의 치레거리로 리용되게 하였다. 그리고 여러 빛갈이 있는 색부채는 젊은 부녀자나 아이들이 사용하였고 혼례때 신랑은 푸른색, 신부는 붉은색을 사용하였으며 상중에 있는 사람은 부채에 아무 장식도 없는 흰 부채를 사용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 조선부채는 높은 실용성과 그 제작기교의 우수성으로 하여 이웃나라들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17세기초엽에 명나라사신을 따라온 상인들에게 네번에 걸쳐 백선 1 800자루, 유선 9 000자루를 넘겨주었다고 한것은 당시 많은 조선부채(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부채를 《고려선》이라고 하였다.)가 수출되였으며 그 제작규모가 얼마나 컸는가 하는것을 능히 짐작할수 있게 한다.
우리 나라 부채는 일본에도 널리 알려져있었다.
조선봉건왕조 후반기 우리 나라 통신사가 여러차례에 걸쳐 수백자루에 달하는 부채를 가지고 가서 일본의 대마도(쯔시마), 오사까, 교또, 에도(도꾜)의 관리들에게 기념품으로 주었다는 사실과 일본에서 우리 나라 부채가 정교하게 제작되고 인기가 있었다고 소개한 당시의 일본력사자료들은 조선부채의 정교함과 아름다움이 매우 컸다는것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우리 인민들의 예술적재능과 정교한 솜씨에 의하여 창조된 부채들은 민족적정서와 취미에 맞는 색갈, 은은하고 정교한 장식미, 아름답고 우아한 형태미, 섬세하고 화려한 조형예술미로 하여 조선부채의 특징들을 잘 나타내고있었다.
오늘 조선부채는 지난 시기의 부채제작기술을 계승발전시켜 사회주의생활양식에 맞는 맵시있고 아름다우며 간편한 부채로 만들어져 널리 리용되고있다.